동방사찰 가운데 제일의 전망


서거정(1420~1488)은  수종사의 전망을 동방사찰 가운데 제일의 전망이라 했습니다.
유홍준이 부석사의 전망을 '국보 0호'라 하니까 수종사의 전망을 '보물 0호'라 합니다.
이 전망 좋은 곳을 옛사람인들 찾지 않을리 없습니다.

고인도 날 못 보고 나도 고인을 못 뵈
고인을 못뵈어도 가던 길 앞에 있네.
가던 길 앞에 있거늘 아니 가고 어이하리.    (퇴계) 

한강과의 연결성도 좋고 풍광도 좋은 수종사는 여러 문인들이 거쳐갔습니다.
그 중에서도 거리가 가까운 다산과의 관계가 깊습니다.
다산이 형과 같이 공부하던 절집이기도 하고
해배되어 고향에 돌아온 후 답답할 때면 이곳을 올랐을 겁니다.

垂蘿夾危?  드리운 담쟁이 넝쿨이 비탈에 끼어

不辨曹溪路  조계로 가는 길을 구별하지 못하겠다

陰岡滯古雪  그늘 진 언덕에 옛 구름 머물고

晴洲散朝霧  맑게 갠 섬에는 아침 안개 흩어진다

地漿湧嵌穴  땅에서는 솟는 물이 골짜기로 흐르고

鐘響出深樹  종소리는 깊은 나무숲에서 울려온다

游歷自玆遍  산을 주유함이 여기서 시작되니

幽期寧再誤  그윽한 만날 약속 어찌 다시 그릇 되리.

                                                                                  다산의 <遊水鐘寺>


세조도 업보인지 건강하지 못했나 봅니다.
1457년 12월, 노산군(단종) 문제를 해결한 후 정치의 안정을 찾았겠죠.
1458년 봄 쯤 세조는 금강산을 다녀오다가 운길산 밑에서 묵었나봅니다.
그래서 수종사 재창건의 얘기에는 세조가 나옵니다.
세조가 심었다는 500년이 훨씬 넘은 나이의 은행나무.
새 잎은 고목이 살아있음을 알립니다.


우리나라 차를 이야기 하자면 초의선사(1786~1866)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초의와 추사 깁정희, 그리고 다산의 작은 아들인 운포 정학유는 같은 나이입니다.
1805년 다산은 혜장의 배려로 강진의 동촌 주가(사의재)에서 고성사(高聲寺)로 옮겨 9달을 지냈습니다.
다산은 자신의 거처를 보은산방(寶恩山房)이라 이름하고 차를 맛들이기 시작합니다.
이 때 44살인 다산은 20살인 승려 초의를 만납니다.
아버지를 따라 내려와 있던 작은아들 학유는 초의와 동갑이라 더욱 절친해졌습니다.

1815년 서른살된 초의는 처음으로 한양 가까이 옵니다.
초의의 글 <수종사회고>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수종사를 찾았고
유산 정학연의 소개로 동갑내기인 추사를 처음 만났습니다.(유홍준, 완당평전 150쪽)

1818년 다산은 18년만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1830년 다산이 69세 때 45살의 초의는 다시 수종사에 와서 겨울동안 머뭅니다.
1831년의 봄엔 다산의 아들 형제와 두릉(마재 부근의 한강)의 강에서 뱃놀이도 하구요.

다산이 죽은(1836) 후 초의는 금강산에 갔다가(1838) 그 다음해 학연, 학유형제를 만나러 마재에 옵니다.
수종사는 적어도 3번의 초의와 인연이 있습니다.
이렇게 다산과 초의와 추사의 흔적이 어려있고 이들이 한국차문화의 원조입니다.
그래서 수종사는 풍광 좋은 자리에 삼정헌을 지어놓고 길손들에게 무료로 차를 공양해 줍니다.


우리 일행도 수종사의 삼정헌 창가에 앉았습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을 내려보고 멀리 여유당의 위치도 확인했습니다.
하느님이 연출할 수 있는 모든 엷은 초록의 빛깔들에 감탄하면서 차를 음미하였습니다.
두 아들을 거느린 다산과 초의, 추사도 시대와 시설은 다르지만 같은 자리에서 같은 눈맛을 느꼇을 겁니다.


신이 만들 수 있는 모든 초록과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이 되는 장엄함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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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종사의 얘기는 끝이 없습니다.
올 때마다 새롭고 올 때마다 좋습니다.
다산과 초의와 추사가 녀던 길을 오늘도 찾아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