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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우선생과 함께한 강화 돌아보기

향린의 '이야기가 있는 여행' 네번째 기획은 강화 새로 보기입니다.
강화에 사는 이시우 선생님께 안내와 해설을 사전에 부탁드렸습니다.
내 생각은 양명학에 중점을 두었지만 이 선생님은 인물 중심의 답사가 어떠냐고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물론 이 선생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선원 김상용(1561~1637), 하곡 정제두(1649~1736), 죽산 조봉암(1898~1959)을 돌아보기로 했습니다.
죽산 선생님의 흔적은 시간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었습니다.
사진작가의 작업실의 가장 넓은 방은 책들로 빼곡하게 둘려 있습니다.
가난하지만 올곧음이 서린 방으로 우릴 안내했습니다.
그리곤 따끈한 차 한잔과 함께 인사를 나눴습니다.

이시우 선생님 키보다 더 높이 쌓인 재판 서류.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아직 2심과 3심이 남았습니다.
국가보안법의 망령......
우리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기도 바쁜데 뒷걸음치고 있습니다.
이번 답사는 우리 역사의 양면성 보기입니다.
선원 김상용과 그의 동생 청음 김상헌의 안동 김씨.
그들의 목숨과 바꾼 강경론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이어갑니다.
하곡 정제두로 시작되는 양명학의 강화학파.
성리학이 진리이고 성리학이 아니면 사문난적이 되던 때, 강화학파는 시대에 도전했습니다.
자본주의가 위장된 자유민주주의는 진리이고 사회주의는 빨갱이라 하는 시대와 다를 것 없었습니다.

선원 김상용
新안동 김문은 김극효(金克孝, 1542~1618)를 중시조로 하는 조선 후기의 명문입니다.
한양의 장의동(종로구 경복고등학교와 청운초등학교 일대)에 살아 장동 김씨라고도 불립니다.
김극효의 아들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 큰아들과 넷째 아들입니다.
큰아들이 김상용(仙源 金尙容, 1561~1637)이고 4남이 김상헌(淸陰 金尙憲, 1570~1562)입니다.
이 집안은 출신이 영남이지만 남인에 줄을 서지 않습니다.
서인과 노론에 줄을 서 권력을 장악하여 60년간의 세도를 잡습니다.
율곡(1536~1584)의 친구인 성혼(1535~1598)의 문하로 공부했습니다.
임진란 때 강화(현재 강화군 선원면)로 피난와 노년인 송강 정철(1536~1593)의 종사관으로 일했답니다.
송강도 태어난 곳이 장의동이니 선원이 까마득한 후배지만 잘 돌봐줬을 겁니다.
김상용은 임진란을 강화에서 보낸 후 그곳의 지명인 선원을 호로 씁니다.
이 집안은 광해군 때는 칩거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등장합니다.
선원도 예조와 호조판서 등 화려한 관직으로 살아갑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선원은 왕명으로 종묘를 모시고 봉림대군 등 왕족들과 강화로 피난했습니다.
몽골도 점령 못한 강화라고 너무 믿었는지 방어에 소홀했나 봅니다.
1637년 1월 22일, 청의 군대는 강화로 넘어왔습니다.
모두들 배를 타고 도망 갈 때 선원 김상용은 화약더미에 올라타고 불을 당겼습니다.
그의 13세의 손자(金壽全)도, 그의 하인도, 말리던 사람들(洪命亨, 金秀男, 權順長, 金益兼)도......
주검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선원이 죽은 지 4년 후, 1641년(인조 19년) 그를 기리는 사당을 세웠습니다.
처음엔 현충사였으나 1658년(효종 9년) 충렬사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김익겸(1614~1637)의 위패.
광산 김씨로 할아버지는 장생(長生, 1548~1631)이고, 아버지는 참판 반(槃, 1580~1640)입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습니다.
강화 충렬사(忠烈詞)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입니다.
24살의 김익겸이 폭사할 때 그에게는 다섯살 된 어린 아들 만기(金萬基, 1633~1687)와
아내 윤씨의 태중에는 유복자가 있었습니다.
이 유복자가 서포 김만중(1637~1692)입니다.
원리주의와 실용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는 장소였습니다.
원리주의는 상황의 변화에 약합니다.
김상용은 죽음으로, 동생 김상헌은 청의 인질로 자신의 신념을 지켰습니다.
근본이 없는 실용주의는 단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근본의 성찰없는 실용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음일 겁니다.
최명길의 실용은 병자란에서 왕을 위한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목숨을 건 안동 김문의 세도는 이 때부터였을 겁니다.
어쩌면 선원 김상용의 죽음을 지켜보았을 봉림대군이었습니다.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안동 김문의 앞길은 보장되었을 겁니다.

강화산성 남문에서 찍었습니다.

점심을 먹은 식당 '콩세알'
강화에서 생산된 유기농산물의 소비를 늘리기 위해 농민단체가 직접 운영하는 식당입니다.

무심코 보았을 땐 그저 풀밭인줄 알았습니다.
이처럼 풀이 멋대로 자라도 돌보는 사람 없는 무덤이 위당 정인보의 스승인 이건방(李建芳)의 묘입니다.
죄스러움과 안스러움......
그에게는 후손도 없나봅니다.
이건방(1861~1939)의 할아버지 이지원(李止遠, ?~1866)과 큰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은
병인년 프랑스 군대에 강화성이 함락되던 날 함께 자결했습니다.
6살이었던 건방은 몰라도 15살이었던 6촌형 건창과 9살이었던 건승은 의미를 또렷이 알았을 겁니다.
그는 입신양명의 출세보다는 공부에만 열중했습니다.
그의 제자 위당 정인보를 끝으로 200년의 강화학파는 막을 내립니다.

낮은 노고산의 능선으로 오르는 길에 나타난 작은 집 한 채.
이시우 선생님이 강화로 와서 3년동안 이 집에서 살았답니다.
시대의 아픔과 싸우는 그는 21세기의 강화학파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이 시대의 우중(愚衆)은 물질로 성공을 이야기 하지만
지행합일을 실천하려는 깨어난 민중은 자유와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의 이건창이 태어난 집입니다.

강화군 화도면 건평리에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의 조촐한 묘가 있습니다.
그는 1852년 강화 사기리에서 이상학의 큰아들로 태어났습니다.
6년 후 동생 건승(建昇, 1858~1924)과 그 후 건면(建冕)이 태어납니다.
1866년 병인년. 이건창의 나이 15살이었습니다.
프랑스의 함대는 강화를 침공했고(1866년 10월)
산성이 함락될 때 할아버지 이시원(당시 76세)과 작은 할아버지 지원은 자결했습니다.
프랑스 군대는 강화읍성을 장악하고 문수산성을 침공했지만 실패해 한달만에 물러났습니다.(11월 11일)
강화방어와 자결한 할아버지를 위로하려고 긴급 과거시험인 별시를 치렀나 봅니다.
모두 6명 뽑은 별시에 이건창은 5등으로 급제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14살 밖에 되지않아 벼슬은 4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였던것 같습니다.
한창 시절엔 어사로 이름을 날렸나 봅니다.
송파구 송파동엔 '이건창영세불망비'도 있고 그를 기념해 '어사길'도 있는 걸 보면......
1894년부터 시작된 갑오개혁에 불만을 느껴 강화로 낙향했다가 47세의 젊은 나이에 죽습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서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 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한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창>

영재 이건창의 묘 뒤 진달래 밭에서 찍었습니다.

오늘 답사의 하이라이트라 할까요?
양도면 하일리의 하곡 선생님의 묘를 찾아나섰습니다.
포은 정몽주의 11대 후손으로 한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하곡이 5살 때(1653년) 돌아가셨습니다.
16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鄭維城, 1596~1664)가 우의정까지 이른 걸 보면 명문가입니다.
스믈 세살 때는 첫 아내도 잃었습니다.
삶의 무상을 느꼈을 겁니다.
명문가의 집안답게 비싼 사교육은 했네요.
20대에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 1632~1695)를 스승으로 모시고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에게도 배웠습니다.
하곡은 권력지향적인 삶보다 학문적 삶을 지향했나 봅니다.
당색(黨色)으로는 서인이었지만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질 때는 소론을 택했습니다.
마흔에 평택현감이 되었지만 두 달만에 그만두고 안산으로 삶의 터를 옮겼습니다.
숙종이 희빈장씨의 원자 책봉문제로 남인 세력이 집권했으니까요.
안산에서의 20년은 양명학 공부에 열중했나 봅니다.
그러나 52살 때 두번째 아내도 먼저 보냈습니다.
환갑 땐 장손마저 병으로 죽고말았습니다.
선영이 있는 강화로 삶의 터를 옮겼습니다.
강화에서 그를 따르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하곡을 강화학파의 시조라고 부릅니다.
전주 이씨 덕천군 집안 사람들, 파평 윤씨 사람들, 평산 신씨 사람들......
양명학을 바탕으로 실학으로, 그리고 나라를 잃자 독립운동으로 나아갔습니다.
근현대사에서 개인을 버리고 희생했던 많은 실천가들이 강화학파거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이 보다 많은 연구가 되어야 할 겁니다.
답사는 죽산 조봉암 살펴보기까지 계획했지만 시간 때문에 더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시우 선생은 전등사 입구에서 내렸습니다.
댁까지 모셔드린다고 했지만 그러면 3시간 이상이 더 지체된다며 사양하셨습니다.
초지대교를 건너 김포의 한강제방길을 따라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한강은 시대의 비극을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철조망으로 사람들의 접근을 막더니 운하를 만들어 하천 생태계를 파멸로 몰아넣으려 합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건만 인간은 자연에게 해악만 끼치는 패륜을 하고 있습니다.
강을 철조망 너머 바라보아야 하는 아픔......
이시우 선생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 더 아픔을 느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