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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성동(水聲洞) 계곡 나들이
2013년 11월 3일. 일요일.
향린교회 어르신들 모시고 안평대군의 집 비해당이 있었던 수성동 계곡이 있는
종로구 옥인동을 다녀왔습니다.
비해당이 있었다는 수성동
늦가을의 수성동엔 물소리(水聲)가 들리지 않습니다.
임금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았던 사람...
젊은 나이지만 최고 명필로 인정 받았던 사람...
사람들을 불러서 시를 쓰는 모임을 즐겼던 사람...
그림을 이해하고 화가를 후원했던 사람...
아버지와 큰형의 뜻을 좇아 조카를 지키려던 사람...
그래서 36의 삶을 마쳐야 했던 사람...
그 사람이 안평대군 이용(1418~1453)입니다.
10분이 함께 했습니다.
윤동주(1917~1945)와 정병욱(1922~1982)이 하숙했던 김송의 집터
문학을 하는 집주인 김송과 음악을 하는 김송의 부인이 살던 집입니다.
1941년.
윤동주와 정병욱이 연희전문 기숙사를 나와 이 집에서 하숙을 했습니다.
음악이 있고, 문학의 토론이 있고...
두 달의 짧은 기간이지만 동주는 좋은 시를 쓸 수 있었겠지요.
일본 경찰의 사찰 때문에 짧지만 행복했던 이 곳 하숙을 끝내야 했습니다.
친일파 윤덕영이 딸에게 선물한 집
윤덕영(1873~1940).
조카딸(동생 윤택영의 딸)이 순종의 부인(순정효황후 윤씨)이 되었죠.
순종에게 옥새를 내놓으라고 겁박한 놈이죠.
조선 땅에 일본 통치가 시작되면서 귀족 칭호도 받고 돈도 받은 놈이죠.
고종 독살의 유력한 용의자이기도 합니다.
인왕산 동쪽 기슭인 종로구 지역을 서촌이라 합니다.
옥인동은 서촌의 한 지역이죠.
완당 김정희(1786~1856)의 청년 시절에
옥인동 지역에 사람들이 시(詩)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 장소를 송석원(松石園)이라 했지요.
윤덕영은 송석원을 포함한 옥인동 대부분을 차지했지요.
여기에다 99칸의 저택을 지었습니다.
그것고 모자라 프랑스에서 가져온 설계도로 서양식 큰 건물도 지었죠.
흐르는 시간 앞에서 모든 것은 낡고 스러지고 없어집니다.
99칸의 한옥 '벽수산장'은 낡을대로 낡았죠.
더구나 여러 사람의 소유로 나누어집니다.
이 집의 형태를 옮겨 놓은 것이 남산 한옥마을에 있습니다.
서양식 건물은 1966년 불에 타서 지금은 흔적도 없습니다.
딸이 결혼하자 윤덕영은 벽수산장의 터 일부에 이 집을 지어줍니다.
해방 뒤에 이 집은 박노수(1927~2013)가 삽니다.
올해 초 박노수가 죽으면서 이 집을 종로구에 기증하나 봅니다.
종로구는 이 집을 종로미술관으로 시민에게 공개했습니다.
이 집 뒤엔 서울 시내를 살펴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습니다.
불의의 댓가로 얻은 부(富)로 잘 먹고 잘 살았겠지요.
문제는 역사의 교훈이죠.
교훈을 얻지 못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 역시 같은 짓을 하죠.
우리 시대는 불의를 단죄하지 못한 댓가를 다시 치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되풀이하려는지....
여기에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눴죠.
현관 위 '여의륜'은 김정희의 글씨입니다.
김정희는 불교에도 심취했죠.
여의륜....
일곱 관음보살 중 하나로 여의주와 법륜을 관장합니다.
중생의 모든 고통을 없애주는 관음보살이죠.
부자로 살아도 고통은 있죠.
뜻밖에 박성준 선생을 만났습니다.
박성준 선생의 아내(한명숙)가 더 유명 인사죠.
국무총리를 지낸 현 국회의원이죠.
박성준 선생은 통인동에서 길담서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건물주가 비우라는 통고에 새로운 자리를 찾아보러 나왔답니다.
김낙중 선생님과 한 컷 찍었죠.
뒷풀이는 중국집에서 중화요리로 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