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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근수 목사 칼럼 안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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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310
그리 가까운 이북(개성)
(1) 개성관광을 준비하며
이 날은 ‘평화의 길’에서 매주 파출부(아주머니)를 보내어 1주에 쓸 반찬을 다 만들어 놓고 청소, 빨래, 설겆이 등을 하는 날이다. 이날 건강 관계로 매주 수원에 한번씩 온천 목욕을 하고 소금찜질 방에 가서 돌아오다가 늦게 시민평화 연대의 조 간사로부터 내일 개성간다는 연락을 늦게 받았다. 이날 따라 지하철로 오는 데 나성국 목사가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그가 사는 공덕동으로 가서 그를 독도 회집에서 만나 저녁을 같이 했다. 저녁식사를 집에서 하리라던 계획은 변경하여야 하였다. 종종 있는 일이다. 향린교회 임기가 벌써 끝나고 그의 장래 계획에 대하여 말하였다. 나도 나름대로 내 의견을 말하였다.
개성 방문에 대한 이메일을 본 후 12시 반경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치 소풍을 가기 전날 밤 어린아이 같이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으나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불을 켜고 자명종 시계를 5시에 맞추어놓고 가져다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언급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권을 찾아 그것을 입구에 놓고야 잠을 청하였다.
3시에 잠을 깼다. 말할 것도 없이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자명종이 울기기 전인 5시 가까이 되어 잠을 깼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흔히 있는 일이다. 잠을 설친다고 할까. 나는 일어나서 운동(스트렛치)를 하고 변소에 갔다. 7시 30분 경에 집을 나섰다. 이 날은 집에서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좀 아팠지만 견딜 만 하였다. 보통은 자동차로 아파트 아래쪽에 세워두고 마을 bus를 타고 가는 것이 상례지만, 오늘 같이 중요한 때는 직접 걸어 가 본다. 나는 경북궁 역에서 내려 박물관 쪽으로 걸어갔다. 경복궁 동편 주차장에서 도착하였다. 전화기는 일부러 집에 놔둔 채 떠났다. 시간을 물어보니 7시 55분이라 하였다. 집합시간이 8시 40분이어서 상당히 빨리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내 원칙은 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성격 탓인 것 같다. 신문을 보고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차가 한대 왔다. 다른 차도 왔다. 내가 4-2호라고 한 차를 올랐더니 왠 사람이 인사를 하였다. 시인인 김효사씨였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는 단순히 나를 제 2의 문익환 목사님으로 여긴다고 말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멸망한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정권이 망했을 뿐이다’ 라고 한 나의 말이 그에게 괭장한 힘이 되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나를 만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작품을 내게 줬는 데 거기는 ‘나의 소원’은 엿장수가 되는 것이라고. 엿장수가 되고 싶은 소원의 이유는 가위로 휴전선 철조망을 몽땅 자르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시를 읽었다.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통일을 이루어 낼 것 같았다. 그 후에 홍대극 집사, 이장희 회장도 와서 아주 반가 왔다. 홍대극 집사님은 ‘이곳에서도 만나게 되었군요.’ 하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사람과 앉았으니 바꾸어 앉기도 어려웠다. 모두 100여명이 간 셈이었다.
(2).개성관광
9시가 되어서야 뻐스가 떠났다. 본래 그렇게 예상했다. 떠날 때는 뻐스 두 대였으나 이윽고 뻐스가 넉 대가 되었다. 경복궁에서 떠난 뻐스는 곧장 연희 IC로 들어가자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에 들려 바로 도라산으로 향했다.(이것은 일정에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나는 도라산에 두 번이나 가 보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곳인 줄 몰랐다. 한번은 민주노총의 새해맞이였고 한번은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 토론회 때였다. 그것은 불과 1달 전이었다. 도라산은 말하자면 남방에서 판문점을 제외하고는 최고로 북으로 갈 수 있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방북증명서”라는 것을 발급받았다. 거기에는 ‘사진과 함께 주민번호, 성명, 생년월일, 방문목적, 방문기간, 증명서 유효기간, 신장 등의 난이 있고 위 사람의 북한 지역 방문을 승인합니다.’로 되어 있고, 2007년 8월 2일자 통일부장관으로 되어 있고 큰 사각도장이 찍혀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도라 역에 도착하였다. 이장희 교수가 부르는 것이었다. ‘남북 출입사무소 소장’ 직의 김형탁 소장 선생을 만나 차를 한 잔 대접을 받고 그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나왔다. 원수의 나라인 미국의 ‘달라’만을 받는다고 하여 우리 은행에서 50불을 바꿨다. 왜 우리 돈을 받지 못하는가? 아니면 왜 이북 돈은 안받는가?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는 있을 것이나 이것은 민족자주적이 아니다.
자동차의 진행을 가로 막은 장애물이 여기 저기 있는 것이 보였다. 군인들이 시간을 끌기에 버스를 탄 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호송 집차는 뻐스 맨 앞쪽에 서 있었다. 이것들이 언제나 없어져 마음대로 차가 오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났다. 이곳에서 북으로 갔더니 남쪽 군인들이 호송을 하다가 2Km 지점인지 앞을 호송하던 집차가 이북하고 교대하는지 오른 쪽 옆에 서고 왼 쪽에 서있던 집차가 가로 질러 오더니 앞서는 것이다.
강인덕 통일부 장관 시절 대변인을 하였다는 홍흥주 씨가 아는 사람처럼 반가히 만나 인사하였다. 이장희 교수는 ‘그와 멱살을 몇 번 잡았느냐’고 농담을 하였다. 나는 유종순 결혼식 주례를 하는 기회에 대한 이야기, 즉 연방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결혼식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때 도미하면서 문규현 신부와 박창신 신부 등에게 미사를 부탁했는지 1부 미사는 문규현 신부가 하고 뒤에 주례를 내가 했다. 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참석하였는지 그 후 그가 ‘그것이 통일강연이지 무슨 주례사냐’고 했다는 야기를 전해 주어 모두 웃었다. 나는 부부란 통일로 말하면 연방제 통일이지 뭐 어느 한 편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는데 신부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부에 근무했으나 요즈음은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곳 이사장인 김동규씨 다음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렇게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많이 있다는 것은 엘리사가 나 혼자 밖에 남은 자가 없다고 했을 때 아합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아직 7천명이나 더 있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그곳 개성공업단지 이사장 김동규씨 방에서 차를 한잔 대접받고 즉시 큰 강단같은 곳에 전체가 모여있는 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날 아침에 온 손님 전부를 만날 수 있었다. 부산지방에서 온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대전에서 온 중소기업 사업가단이 그들로서 한 100여명 되었다. 관리 이사장 김동규씨는 개성공단의 역사를 다소 얘기했다. 그는 아주 전망이 밝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김동규 이사장은 개성공업단지 규모가 2,000평 규모라 하였다.
점심식사 전에 홍대극 집사는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최회 측인 홍흥주씨에게 ‘이북 당국이 개성을 공업단지로 허락한데 대하여 홍보하지 않는다고 건의하였다. 이 개성으로 말하면 휴전선 남단에 위치 했을 뿐 아니라 이곳이 포대가 있던 곳이었는 데 이것을 다 파해치고 허락을 했고 그곳에 공장을 지었다며 이북 당국의 용단을 선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통일시민연대>에서 지난 4월 18일 개성 지역에 나무심기 행기를 한다기에 얼른 신청을 해 놓았으나 남.북 관계가 순조롭지 않라못 그마저 취소가 되어 참으로 애석해하다가 이번에 예약을 하여 북한다시 한 땅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 전력 사무소, 우리은행 개성 지점 등을 안내.설명을 들은 다음 곧장 점심식사 하러 갔다. 북한 식당인 모양이었다. 김근태 국회의원이 춤을 췄다는 식당이 그 옆에 있다고 하였다. 대전에서 어떤 사장인가가 건배를 하였다. 이북의 한철 위원장(그가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은 부산에서 온 여성노동자들을 의식하고 여성들을 위하여 건배를 제안했다. 그리고 김동규 ‘개성공업단지 관리위원회 이사장’이 남자들을 위한 건배를 제안하였다. 그는 한철 위원장이 여성노동자를 위해 건배하였기에 남자들이 기가 죽어있다고 제안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끝마친 다음 현대아산을 구경했다. 거기 일행들 중 가장 핵심지역이고 명당인 곳에 현대 아산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으나 증명될 수는 없었다. 그곳은 모두 평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KMF인가 하는 공장의 박성천의 안내를 받았다. 자동차 부품공장으로 자동차 필타(filter)를 생산한다고 하였다. 북한 노무원은 295명이라 하였다.
그 다음 견학한 곳은 솔루틱 GS라는 곳이었다. 랜즈를 만들고 핸드폰 부품을 만드는 공장인 모양이다. 휴가를 가서 두 라인만 조업하고 있다고 하였다. 북한 노동자는 350명이고 남한에서는 겨우 8명이라고 하였다. 외래어를 많이 써서 좀 느낌이 묘했다.
나와 함께 한 김효사씨는 북한 상품 사는 것을 못보고 나온 나를 대신하여 둘째 bus에 탄 두 분이 북한 군인을 찍어 그것이 나오다가 책크되어 벌금을 문다고 3시 월경을 놓쳐 결국 3시 반에 월경을 해야 한다고 기다리는 시간에 북한 사무직원에게 양해를 구하여 북한 쪽에 가서 물건을 사주었다. 그것이 술이었다. 그냥 돈을 받지 않아 그냥 공짜로 주었다. 그는 북한 인을 처음 만난 감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내 주위 인사들을 다 알고 있었으나 나와는 생명부지간이다. 그는 박석율 선배라고 말하고 그에게 전화하여 대 주어 몇 마디 했다. 그는 꿀을 부탁하였고 그 꿀을 샀기 때문에 그에게 전화하여 4시 반에 경복궁에 나오게 한다고 전화했으나 그는 전남 광주에 있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월요일에 평통사 운영위원회가 모이니까 어차피 의장으로서 참석해야 되니까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평양과 금강산에 두 번씩 가보았고 북한 사람들을 처음 대한 감격이 컸다고 말해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느라고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홍 목사님, 이장희 교수님은 내게 모두 소중한 분들이지만, 내게 지금 북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 분들과 잘 통한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는 술을 한 병을 병두껑에 둘이서 다 비우자고 하여 피할 수도 없어 그냥 마셨다.
홍대극 집사가 대신 짐을 들어주어 고마웠다. 그리고 경복궁 역에 도착해서는 그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나는 한참 기다렸다가 구파발 가는 전철을 탔다. Bus는 친절하게도 경복궁 역 앞에 세워주었다. 나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지하철 역에 와서는 짐을 그냥 들고 택시를 탔다. 집에 도착하여서는 5시 쯤 되었는지... 이북에 다녀오는 것이 그리 간단하고 그리 가까운데 하는 생각을 좀 해 보았다.
(1) 개성관광을 준비하며
이 날은 ‘평화의 길’에서 매주 파출부(아주머니)를 보내어 1주에 쓸 반찬을 다 만들어 놓고 청소, 빨래, 설겆이 등을 하는 날이다. 이날 건강 관계로 매주 수원에 한번씩 온천 목욕을 하고 소금찜질 방에 가서 돌아오다가 늦게 시민평화 연대의 조 간사로부터 내일 개성간다는 연락을 늦게 받았다. 이날 따라 지하철로 오는 데 나성국 목사가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그가 사는 공덕동으로 가서 그를 독도 회집에서 만나 저녁을 같이 했다. 저녁식사를 집에서 하리라던 계획은 변경하여야 하였다. 종종 있는 일이다. 향린교회 임기가 벌써 끝나고 그의 장래 계획에 대하여 말하였다. 나도 나름대로 내 의견을 말하였다.
개성 방문에 대한 이메일을 본 후 12시 반경에 잠자리에 들었으나 마치 소풍을 가기 전날 밤 어린아이 같이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다.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으나 생각나는 것이 있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일어나서 불을 켜고 자명종 시계를 5시에 맞추어놓고 가져다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언급이 없었지만, 그래도 여권을 찾아 그것을 입구에 놓고야 잠을 청하였다.
3시에 잠을 깼다. 말할 것도 없이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자명종이 울기기 전인 5시 가까이 되어 잠을 깼다.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흔히 있는 일이다. 잠을 설친다고 할까. 나는 일어나서 운동(스트렛치)를 하고 변소에 갔다. 7시 30분 경에 집을 나섰다. 이 날은 집에서 전철역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좀 아팠지만 견딜 만 하였다. 보통은 자동차로 아파트 아래쪽에 세워두고 마을 bus를 타고 가는 것이 상례지만, 오늘 같이 중요한 때는 직접 걸어 가 본다. 나는 경북궁 역에서 내려 박물관 쪽으로 걸어갔다. 경복궁 동편 주차장에서 도착하였다. 전화기는 일부러 집에 놔둔 채 떠났다. 시간을 물어보니 7시 55분이라 하였다. 집합시간이 8시 40분이어서 상당히 빨리 왔음을 알 수 있었다. 흔히 있는 일이었다. 내 원칙은 시간에 늦지 않으려는 성격 탓인 것 같다. 신문을 보고 기다렸다. 이윽고 시간이 되어 차가 한대 왔다. 다른 차도 왔다. 내가 4-2호라고 한 차를 올랐더니 왠 사람이 인사를 하였다. 시인인 김효사씨였다.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분이었다. 그는 단순히 나를 제 2의 문익환 목사님으로 여긴다고 말할 뿐 아니라 ‘사회주의가 멸망한 것이 아니고 사회주의 정권이 망했을 뿐이다’ 라고 한 나의 말이 그에게 괭장한 힘이 되었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그는 나를 만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한다고 말하였다. 그가 옆에 앉아도 되겠느냐고 하여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작품을 내게 줬는 데 거기는 ‘나의 소원’은 엿장수가 되는 것이라고. 엿장수가 되고 싶은 소원의 이유는 가위로 휴전선 철조망을 몽땅 자르자는 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시를 읽었다.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이 통일을 이루어 낼 것 같았다. 그 후에 홍대극 집사, 이장희 회장도 와서 아주 반가 왔다. 홍대극 집사님은 ‘이곳에서도 만나게 되었군요.’ 하는 것이었다. 이미 다른 사람과 앉았으니 바꾸어 앉기도 어려웠다. 모두 100여명이 간 셈이었다.
(2).개성관광
9시가 되어서야 뻐스가 떠났다. 본래 그렇게 예상했다. 떠날 때는 뻐스 두 대였으나 이윽고 뻐스가 넉 대가 되었다. 경복궁에서 떠난 뻐스는 곧장 연희 IC로 들어가자 자유로를 타고 임진각에 들려 바로 도라산으로 향했다.(이것은 일정에 자세하게 나와 있었다. 나는 도라산에 두 번이나 가 보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곳인 줄 몰랐다. 한번은 민주노총의 새해맞이였고 한번은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 토론회 때였다. 그것은 불과 1달 전이었다. 도라산은 말하자면 남방에서 판문점을 제외하고는 최고로 북으로 갈 수 있는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곳이었다.
거기서 “방북증명서”라는 것을 발급받았다. 거기에는 ‘사진과 함께 주민번호, 성명, 생년월일, 방문목적, 방문기간, 증명서 유효기간, 신장 등의 난이 있고 위 사람의 북한 지역 방문을 승인합니다.’로 되어 있고, 2007년 8월 2일자 통일부장관으로 되어 있고 큰 사각도장이 찍혀있었다.
우리는 순식간에 도라 역에 도착하였다. 이장희 교수가 부르는 것이었다. ‘남북 출입사무소 소장’ 직의 김형탁 소장 선생을 만나 차를 한 잔 대접을 받고 그의 따뜻한 영접을 받고 나왔다. 원수의 나라인 미국의 ‘달라’만을 받는다고 하여 우리 은행에서 50불을 바꿨다. 왜 우리 돈을 받지 못하는가? 아니면 왜 이북 돈은 안받는가? 여기에는 나름대로 이유는 있을 것이나 이것은 민족자주적이 아니다.
자동차의 진행을 가로 막은 장애물이 여기 저기 있는 것이 보였다. 군인들이 시간을 끌기에 버스를 탄 채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호송 집차는 뻐스 맨 앞쪽에 서 있었다. 이것들이 언제나 없어져 마음대로 차가 오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한 생각이 났다. 이곳에서 북으로 갔더니 남쪽 군인들이 호송을 하다가 2Km 지점인지 앞을 호송하던 집차가 이북하고 교대하는지 오른 쪽 옆에 서고 왼 쪽에 서있던 집차가 가로 질러 오더니 앞서는 것이다.
강인덕 통일부 장관 시절 대변인을 하였다는 홍흥주 씨가 아는 사람처럼 반가히 만나 인사하였다. 이장희 교수는 ‘그와 멱살을 몇 번 잡았느냐’고 농담을 하였다. 나는 유종순 결혼식 주례를 하는 기회에 대한 이야기, 즉 연방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결혼식은 함세웅 신부가 주임신부로 있는 때 도미하면서 문규현 신부와 박창신 신부 등에게 미사를 부탁했는지 1부 미사는 문규현 신부가 하고 뒤에 주례를 내가 했다. 강인덕 통일부 장관이 참석하였는지 그 후 그가 ‘그것이 통일강연이지 무슨 주례사냐’고 했다는 야기를 전해 주어 모두 웃었다. 나는 부부란 통일로 말하면 연방제 통일이지 뭐 어느 한 편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역설했는데 신부들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이를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통일부에 근무했으나 요즈음은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곳 이사장인 김동규씨 다음 가는 사람이었다. 나는 이렇게 나를 아는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 많이 있다는 것은 엘리사가 나 혼자 밖에 남은 자가 없다고 했을 때 아합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자가 아직 7천명이나 더 있다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우리는 그곳 개성공업단지 이사장 김동규씨 방에서 차를 한잔 대접받고 즉시 큰 강단같은 곳에 전체가 모여있는 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날 아침에 온 손님 전부를 만날 수 있었다. 부산지방에서 온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대전에서 온 중소기업 사업가단이 그들로서 한 100여명 되었다. 관리 이사장 김동규씨는 개성공단의 역사를 다소 얘기했다. 그는 아주 전망이 밝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였다. 김동규 이사장은 개성공업단지 규모가 2,000평 규모라 하였다.
점심식사 전에 홍대극 집사는 개성공업지구 관리위원최회 측인 홍흥주씨에게 ‘이북 당국이 개성을 공업단지로 허락한데 대하여 홍보하지 않는다고 건의하였다. 이 개성으로 말하면 휴전선 남단에 위치 했을 뿐 아니라 이곳이 포대가 있던 곳이었는 데 이것을 다 파해치고 허락을 했고 그곳에 공장을 지었다며 이북 당국의 용단을 선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평화통일시민연대>에서 지난 4월 18일 개성 지역에 나무심기 행기를 한다기에 얼른 신청을 해 놓았으나 남.북 관계가 순조롭지 않라못 그마저 취소가 되어 참으로 애석해하다가 이번에 예약을 하여 북한다시 한 땅을 다녀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한국 전력 사무소, 우리은행 개성 지점 등을 안내.설명을 들은 다음 곧장 점심식사 하러 갔다. 북한 식당인 모양이었다. 김근태 국회의원이 춤을 췄다는 식당이 그 옆에 있다고 하였다. 대전에서 어떤 사장인가가 건배를 하였다. 이북의 한철 위원장(그가 그 지역에서는 가장 높은 사람인 것 같았다)은 부산에서 온 여성노동자들을 의식하고 여성들을 위하여 건배를 제안했다. 그리고 김동규 ‘개성공업단지 관리위원회 이사장’이 남자들을 위한 건배를 제안하였다. 그는 한철 위원장이 여성노동자를 위해 건배하였기에 남자들이 기가 죽어있다고 제안 설명을 하였다.
우리는 점심 식사를 끝마친 다음 현대아산을 구경했다. 거기 일행들 중 가장 핵심지역이고 명당인 곳에 현대 아산이 자리를 잡았다고 하였으나 증명될 수는 없었다. 그곳은 모두 평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KMF인가 하는 공장의 박성천의 안내를 받았다. 자동차 부품공장으로 자동차 필타(filter)를 생산한다고 하였다. 북한 노무원은 295명이라 하였다.
그 다음 견학한 곳은 솔루틱 GS라는 곳이었다. 랜즈를 만들고 핸드폰 부품을 만드는 공장인 모양이다. 휴가를 가서 두 라인만 조업하고 있다고 하였다. 북한 노동자는 350명이고 남한에서는 겨우 8명이라고 하였다. 외래어를 많이 써서 좀 느낌이 묘했다.
나와 함께 한 김효사씨는 북한 상품 사는 것을 못보고 나온 나를 대신하여 둘째 bus에 탄 두 분이 북한 군인을 찍어 그것이 나오다가 책크되어 벌금을 문다고 3시 월경을 놓쳐 결국 3시 반에 월경을 해야 한다고 기다리는 시간에 북한 사무직원에게 양해를 구하여 북한 쪽에 가서 물건을 사주었다. 그것이 술이었다. 그냥 돈을 받지 않아 그냥 공짜로 주었다. 그는 북한 인을 처음 만난 감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내 주위 인사들을 다 알고 있었으나 나와는 생명부지간이다. 그는 박석율 선배라고 말하고 그에게 전화하여 대 주어 몇 마디 했다. 그는 꿀을 부탁하였고 그 꿀을 샀기 때문에 그에게 전화하여 4시 반에 경복궁에 나오게 한다고 전화했으나 그는 전남 광주에 있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월요일에 평통사 운영위원회가 모이니까 어차피 의장으로서 참석해야 되니까 나에게 부탁하였다. 나는 평양과 금강산에 두 번씩 가보았고 북한 사람들을 처음 대한 감격이 컸다고 말해줄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느라고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홍 목사님, 이장희 교수님은 내게 모두 소중한 분들이지만, 내게 지금 북한 사람들이 오히려 그 분들과 잘 통한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는 술을 한 병을 병두껑에 둘이서 다 비우자고 하여 피할 수도 없어 그냥 마셨다.
홍대극 집사가 대신 짐을 들어주어 고마웠다. 그리고 경복궁 역에 도착해서는 그는 반대방향으로 가고 나는 한참 기다렸다가 구파발 가는 전철을 탔다. Bus는 친절하게도 경복궁 역 앞에 세워주었다. 나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지하철 역에 와서는 짐을 그냥 들고 택시를 탔다. 집에 도착하여서는 5시 쯤 되었는지... 이북에 다녀오는 것이 그리 간단하고 그리 가까운데 하는 생각을 좀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