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임목사 안식년 소식
- 열린논단
- 홍근수목사 칼럼
- 통일한마당
- 좋은글 또 보기
- 향린포커스
- + 나의 글밭
- + 릴레이 글마당
-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 향린 Poll
- 홈페이지 도움말
- 웹진/홈페이지 Q&A
향린웹진의 운영과 관련된 의견, 문의 사항도 이곳에 올려주십시요.
성서배움자료 토론2에 더하여 그냥 올리는 글입니다.
원래위치:http://junggon.blog.me/120149507578
제목 : 그리스도인이 전통방식의 제사를 지내도 문제 없다.
[성령의 9가지 열매- Galatae/갈라티아서 5장22절~23절]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이것을 금하는 법은 없습니다. ”
이것은 소위 성령의 9가지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치추구는 동양의 고등한 사상과 종교들에서도 얼마든지 발견된다. 우리가 보는 성경이 경전으로써 가지는 권위와 가치는 내용의 폐쇄성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인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인류가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역사를 진보시킴을 우리가 역사의 예증으로 알기 때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경전성은 인류가 쌓아 놓은 다양하고도 풍부한 지적 자산들을 결코 거부하지 않는다. 실로 악한 나무가 선한 열매(인류의 사상/종교의 지적 자산)를 맺을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다른 고등 사상이나 종교와 다르게 우리의 성경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핵심을 담고 있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 교본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의 성경을 생활의 중심으로 삼되, 그렇다고 해서 인류의 자산이라는 다른 지혜의 경전들에 대해 적어도 배타적인 폐쇄성 만큼은 띨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그래서 우리는 열린 신앙과 사고방식을 가졌다고 자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최소한 보수근본주의 같은 신앙은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기에 성서에 대한 이해도 축자영감설 같은 것을 벗어난 인문학적 성경이해로 사회적 약자의 해방과 주님의 창조질서에 근간한 생명평화의 가치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직 명확하게 보수신앙과 차별화 못한(또는 필요성을 못 느꼈을까?) 영역도 있다. 흔히들 물어오는 하나님이란? 원죄란? 구원이란? 영생이란? 등의 영역들일 것이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논의는 다음에 하고 여기서는 제사의 우상숭배론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이제 곧 새해와 설날이 다가옴에 따라 , 고유의 전통과 신앙들이 불충분하게 이해되어 격게 되는 불편함. 즉 전통적 제사/차례에 대한 거부감의 탈피를 도와 신앙적 양심을 건강하게 해주하기 위해 쓴다. 나는 제사에 참석한다. 제사의 의미도 잘 파악하고 있으며, 미래에 다가올 제사도 가능하면 잘 지켜내고 싶다. 짧은 식견이나마 유학에서 보는 제사에 대한 관점의 이해와 , 예수교에서 거부하는 우상숭배와 비교하여 신앙적 양심을 회복시켜 보려는 것이 주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 전통적 유학에 근간한 제사 행위는 기독교 교리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 글에서는 유교와 유학이 섞여 쓰이는 일반적 상황에서 탈피하여 종교로 보는 유교가 아닌 사상으로서의 유교, 즉 유학으로 명칭을 통일하여 글을 이어가겠다. 곁가지 이야기지만 유학은 중국 송나라 때에 주희(주자)가 성리학으로 체계화 집대성하고 , 명대에 들어서는 명리학이 생기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 우리 선조는 성리학을 국가운영의 근간이념으로 삼았다.
글을 이어가려면 먼저 유학의 삶과 죽음에 대한 관점을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해봐야 하겠다.
우리 예수교는 삶에서부터 죽음 이후까지 이어지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추구함을 가지는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다. 유학에서는 어떨까? 고대 인간은 죽음에 무지했고 ,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삶에 대한 애착이 된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도 죽음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공자에게 ‘감히 죽음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공자의 대답은 약간 의외였다. “아직 삶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겠는가” <논어>의 이 일화는 유학에 내세관이 없음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내용으로 자주 쓰인다.
공자는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궁금해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가령 공자는 괴이한 일, 무력과 관계되는 일, 매끄럽지 못하면서 어렵고 까다로운 일, 신기한 일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공자에게서 죽음과 관계된 언급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죽고 사는 것에는 명(命)이 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명’은 ‘자연 질서’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은 ‘자연 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저 제 수명을 다하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공자도 역시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애통하지만 죽음도 자연 질서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공자에게 중요한 것은 삶 속에서 어떻게 도를 깨닫고, 인(仁)을 이룰 것 인가이지 죽음을 어떻게 하면 늦출 수 있을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공자의 죽음에 대한 대답은 제자의 관심을 삶에서의 일로 돌려 놓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원래 공자는 왜 태어나고 죽는가에 대한 메커니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단지 죽음이 자연 질서의 한 부분임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후대 주자(주희)의 성리학에서는 태어나고 죽는 것을 기(氣)가 모이고 흩어지는 데 따른 결과로 해석하기도 했다.
가령 주희는 “기가 모이면 태어나고, 기가 흩어지면 죽는다”고 주자이론에서 설명했다. 하지만 이 설명은 삶과 죽음에 대한 풍부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불교와 도교에 대항할 방대한 형이상학적 체계를 세우려는 유학(성리학)의 연구 목적과 관련이 있을 뿐이지, 유학의 사생관(死生觀)을 얘기할 때 중요한 것은 위래서 설명한 것과 같은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지 그 메커니즘에 대한 설명은 아닌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하여 이야기 했으니 이제는 필연코 제사와 관계가 있는 귀신(鬼神)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겠다.
유학에서는 귀신이란 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ghost와는 다르다. 귀신 관념은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한 고대적 인식을 반영한다. 공자시대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연 현상을 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자연 현상을 신비스러운 것, 헤아릴 수 없는 것, 그러면서도 힘을 가진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귀신이라는 범주로 추상화하였던 것이다.
주역사상에서 “음양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신이라고 한다”고 한 것이나 중용에서 “귀신의 덕이 성하니,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을 수 없다”고 한 것은 귀신에 대한 위와 같은 설명의 한 근거가 된다. 즉,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는 자연의 질서 같은 것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시간이 간 후 알게 되는 것이고, 열매가 커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으나 시간이 지나면 성장해있는 것을 알게 됨을 설명한 것이다.
도올 김용옥 교수의 설명을 빌자면 서로 일맥상통하는 말로 사용되는 단어를 묶어보면 다음과 같다. (EBS 김용옥의 중용 강의를 보길 추천한다.)
신(神)-천(天)-기(氣)-혼(魂)-양(陽) 등등...
귀(鬼)-지(地)-혈(血)-백(魄)-음(陰) 등등…
붙여서 쓰면 귀신, 천지, 기혈 , 혼백, 음양 같은 많이 들어온 단어가 된다. 성리대전(性理大典)에 따르면 ‘귀’는 땅의 질서요 속성으로 ‘음’에 속하여 기가 구부러지고 소멸하는 속성을 지니며, ‘신’은 하늘의 질서요 속성으로 ‘양’에 속하여 기가 퍼지고 자라나는 속성을 지닌다. 인격적 개체가 아니라 자연 질서의 기의 작용으로서 귀신을 이해했던 것이다.
그 이해가 사람으로 가면,
사람은 귀신의 개념이 사람에 적용되어 혼(魂)과 백(魄)이 결합된 것으로써 태어나고, 그것이 분리됨으로써 죽는다고 봤다. 혼은 정신적 요소를 가리키고, 백은 육체적 요소를 가리킨다. 정신을 놓고 있는 사람을 보고 혼이 빠졌다고 하는 이유도 그에 연유한다.
그리고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자연의 질서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혼은 양기라 위로 흩어지고 백은 음기라 땅으로 돌아간다고 여긴다. 이럼으로써 유학은 정확히는 성리학은 귀신을 인격을 가진 개체가 아니라 자연현상, 기의 작용과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사는 왜 지내는가?
유학이 죽음 이후에 영혼의 개체성과 인격성을 부정한다면 제사 의식에서 강신례(降神禮)는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강림할 혼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를 초대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는가?
유학은 당시 사람들이 이미 관습처럼 지내온 도교와 불교에서 유래된 제사의 양식을 흡수하여 유학의 제사의 기본적 형태를 갖추는데, 이것은 당시 민중의 삶 속에 유학사상을 퍼뜨리고 정착시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제사의 형이상학적 틀은 새로 짜 맞추었는데, 혼백이 분리되어 혼이 소멸하는 기간을 4대로 잡은 것이다. 혼은 결국 소멸하지만 그 기간은 자식과 손자와 증손자와 고손자(玄孫子)가 죽을 때까지 천천히 진행된다는 이론을 고육지책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후손은 제사를 통해서 고조 할아버지까지 그 기운으로 함께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이론이 형성된 근간은 유학의 중요 이념중 하나인 ‘효’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자그마한 선물에도 감사함을 느끼는데, 생명이라는 커다란 선물을 준 부모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대하고 일상을 살아가면 그것이 효가 되는 것이다. 유학의 제례 의식은 이러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정서를 형식화한 것이다. 공자가 “부모님께 제사를 지낼 때에는 부모님이 옆에 계신 듯이 행동하라”고 한 것이나 <중용>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죽은 선조를 산 어버이 섬기는 것과 같이 한다”(4대까지는 혼의 기운이 함께 할 수 있다고 보고 있으므로)고 한 것도 모두 이 때문이다. 따라서 유학의 제례 의식은 종교적이지 않고 철저히 도덕적인 의미를 갖는다.
제사를 지내는 것은 살아생전 사랑했던 그리운 조상(氣/魂)을 모시고 한끼 음식을 봉양하는 절차이고-오랫동안 절을 하거나 잠시 자리를 비우는 유식(侑食)이라는 절차가 있지 않은가-, 조상의 덕행을 생각하고 자신을 반성하는 마음을 가지는 시간이다. 선조들의 덕행을 본받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효를 실천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복을 빌거나 화를 면할 목적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은 유학적(유교적)으로 잘못된 일이다. 유학은 근본적으로 도덕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우상숭배라는 것은 주님을 믿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 대한 가치관이나 기대함, 의지함을 우리 주께 하지 않고 다른 신, 또는 신적 존재에게 의지하는 것을 말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볼 때 흔히 말하는 우리를 돌봐줄 조상신이란 것이 유학에는 없으며, 제사 또한 효의 실천 방식일 뿐 우상숭배가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성서에서도 마가복음 7장1~16절을 보면 효에 대한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율법을 지키려다 부모에게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음을 예수님이 책망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효도와 제자의 도가 상충 할 때는 언제나 제자의 도가 우선시 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효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간의 보편적 가치임을 알 때 , 우리는 우리 고유의 전통적 방식으로 하는 효의 실천적 모습 속에 제사가 끼어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믿는 기독교를 핑계 삼아 일부러 멀리하거나, 남에게 끊기를 종용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임을 알리고 졸필을 마친다.
참조 및 인용 :
*성균관대학교 유학과 교재편찬위원회
*기독교 효 사상의 특징과 현대적 의의(평택대 김동수)
*EBS 특강 - 김용옥의 ‘중용, 인간의 맛’
*미래에서 온 기독교(정강길)
성경을 읽거나 해석해본적은 없지만 하느님도 효는 무한한 사랑으로 보아 나 를 버릴줄 알고 몸으로 실천하라는 (영화나 이야기)십자가에 박혀 아픔을 이겨나간점)것이 아닌가(나의생각.)?
요사이 모든종교는 몸을 아끼는 것에 더욱 충실하지 않나생각들어요.
실제의 가르침은 몸으로 실천하라는것 같은데.(예:스님이 자동차로 편하게 움직이고. 일요일 외는 교회에 화장실도 못쓰게 문을 잠그고) "사랑"이란 기본틀은 나 를 버리고(십자가)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다른것을 인정하고. 그림자같이 베풀라는것으로 보이는데요.(부보는 살아계시든 자연을 돌아가셨든 마음에 행복에 끈이 아닌가요. 날 사랑하셨다는 믿음,그러므로 돌아가셨을 때는 절절을 하여 마음이 편한사람은 절을하고,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기도하고. 돌아가신날을 기려서 생각하는점 제사 를 지낼때의 상차림은 모든 음.양.을 생각하여 음식의 종류나 형식을 효의 바탕이라 생각하여 정성의 표현이 아닌가 생각되네요.하여 음식의 차림은 내가 나를 위함이 아니고 마음이 담긴 정성으로 상차림을 해야하지않나 해요.(기독교를 믿는 일부사람들은 자기들이 먹기 좋아하는 음식을 차려놓고 뒤돌아 않아서 기도만 한다네요.사진을 놓고 빈상앞에 않아서 기도드리고 돌아않아서 상차린음식을 먹는다네요).형제들 중에 기독교인도 있고. 불교인도 있고. 타종교도 있으련만. 배려가 전혀 되지않아요. 허니 제사를 따로 지내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