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선교 227호 원고, 2017년 6월호]      

  

                                            한신과 나

                                                                                                                                                                                                                     조헌정

    

  내가 한국신학대학(이하 한신’)을 다닌 기간은 1972년부터 1976년까지이다. 이 기간은 박정희독재 권력이 영구 집권을 꾀하면서 기이하기 짝이 없는 유신헌법을 제정하여 행정 입법 사법 삼권을 장악함으로 영구집권을 꾀하던 시기로서 긴급조치 1호부터 9호까지를 줄줄이 공포하여 수많은 젊은이들과 민주통일인사들을 마구잡이로 끌어가던 시기였다. 419 민주항쟁 이후 잠잠했던 학원가의 저항이 가장 극렬했던 시기로 전국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연일 데모를 하였지만, 가장 대표적인 대학은 휴업령은 물론 휴교령까지 받은 한신대와 고려대였다. 휴교 명령은 학생과 교수의 학교 출입이 전면 금지 당하는 폐교령 직전의 정부의 불법 통치 행위였다. 고려대는 학생 수가 수천 명의 종합대학이었지만, 한신대는 학생 수 불과 200여명 의 단과대학이었다. 그런데도 교수와 학생 전체가 똘똘 뭉쳐 저항을 함으로 박정희에게는 큰 골치거리였다. 물론 그 배후에는 기장 교회가 있었고, 이 투쟁의 전면에는 기장의 상징 인물이셨던 김재준목사님께서 함석헌선생님과 함께 삼선개헌저지국민운동본부대표를 맡고 있었던 것이고 당시 가장 많은 해직교수와 투옥학생들이 나온 대학이 한신이었던 것이다. 그래 박정희는 한신대를 폐교시키고자 했지만, 세계 교회의 압력으로 인해 이를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향린교회 목사로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현장 투쟁에 앞장 서 있지만, 당시 나는 운동권 학생은 아니었지만, 데모에는 종종 참여하였으며, 외부 사회활동으로 인해 민청련 관련하여 조사를 받기도 하였으며, 3학년 때는 기숙사에 머물던 50여명이 새벽에 뒷문으로 빠져 나와 동아일보 사옥 앞에서 기습 시위를 벌였는데, 이때 전원 구속되었을 때, 한 달 구류를 산 적이 있다. 당시 난 내부 논의 과정에서 기습 거리 시위를 적극 주장했고, 당일 성명서 인쇄물을 품 안에 감추고 정문으로 나가면서 담당 형사와 아침 인사까지 나누기도 하였는데, 정작 주동으로 찍혀 실형을 산 사람은 다른 동료들이었다. 이 광화문 시위는 80년대 유행하던 거리 기습 시위의 효시였다. 아침 9시 출근 시간에 맞춰 스크럼을 짜고 유신철폐’ ‘민주인사석방구호를 외치며 종로 2가를 가로지르자 경찰 트럭 2대가 와서 전원을 끌고 갔다. 그런데 당시 약간 늦게 현장에 도착했던 두세 명의 학생들은 이미 출발하여 달리는 트럭에 전력을 다해 뛰어와 올라타는 뜨거운 동료애를 보여주기도 했다.(지금은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누구였는지 알고 싶다.)


     이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박정희는 한신대에 재학 중인 재일교포 학생을 이용하여 재일학생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언론에 대서특필하였다. 물론, 지금은 다른 간첩단 사건과 마찬가지로 완전 조작임이 만 천하에 드러났지만, 이때 구속된 분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고통 중에 있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으니 수업이 제대로 진행될리가 만무했다. 사실 한신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신학의 내용이라기보다는 신학이 서 있는 자리가 본래 어떠해야 함을 배운 것이다. 목사 이전에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이 있듯이 신학의 내용을 배우기 전에 어떤 신학을 공부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가끔 신학자들 가운데는 삶과 유리된 탁상공론(卓上空論)의 교리나 이론들을 주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기 때문이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이 시기 한신대 교수로 계시다가 해직을 당하셨던 안병무 문동환교수님 그리고 문익환목사님과 연세대의 서남동교수님을 중심으로 민중신학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이 신학이 갖고 있는 신학적인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였는데, 후에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면서 민중신학이 갖는 세계사적인 맥락과 그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었으며, 석사 논문으로 민중신학의 입장에서 본 마가복음의 기적 이야기를 쓰기도 했으며 교회의 목회자로서 30년을 살아오는 동안 민중신학적 입장을 계속 견지하여 왔다. 여기서 이와 관련하여 하나의 알려지지 않은 얘기를 언급하자면, 80년대 초반 뉴욕 유니온신학대학을 비롯한 하바드 예일 프린스톤신학대학에서는 한국을 비롯한 동양계 4년제 (신학) 대학 졸업자들에 대한 M.Div. 과정 입학이 허락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박사과정에 공부하는 한국 학생은 여러 명 있었지만, 미국교회 봉직을 목적으로 한 M. Div. 과정에는 내가 아는 한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83년도에 유니온신학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여기에 민중신학이 보이지 않는 영향을 끼쳤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이후 나는 미국장로교에서 안수를 받고 한인교회에서 근 20년 가까이 이민 목회를 하다가 향린교회에 홍근수목사님 후임으로 오게 되었다. 향린교회는 외형상 결코 크지는 않지만, 그 신학과 실천의 내용으로 본다면 남북통일과 약자와 함께 하는 사회선교 부문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가장 진보적인 교회이다. 이는 나의 주장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주장이다. 특히 올해는 루터의 Reformation 500주년을 기념하는 해로서 독일 교회의 날(Kirchen Tag) 행사가 베를린에서 있는데, 향린교회의 얼쑤풍물패가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 이 행사에 참여하여 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인도할뿐더러, 독일교회가 아닌 독일정부가 6개월간의 특별한 전시행사를 진행하는 일에도 향린교회가 소개되고 있다. 독일정부 문화종교부는 세계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나라 4개국을 대륙별로 선정하였는데, 아시아에서는 한국이 선정되었다. 이 한국교회 전시관에 향린교회를 상징하는 물건 3개가 지금 전시 중에 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하나는 고 홍근수목사님 투옥 이후 28년동안 교회 외벽에 걸려 있던 커다란 현수막 3개이다. 국가보안법을 철폐하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정의를 심어 평화의 열매를이다. 두 번째는 홍근수목사님 국가보안번 위반 투옥 시절 석방을 요구하며 전 교인이 기도로 서명을 한 1M X 1M 크기의 보라색 천이다. 세 번째는 내가 향린교회에 부임하면서 매해 815해방주일 예배 때마다 사용하던 상징물이다. 50cm X 20cm 가로 판대기에는 대한민국,’, 1.2M X 20cm 세로 판대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써 있는 판이다. 나는 설교 마지막에 에스겔서 37장의 말씀 곧 하느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마른 뼈 환상을 보여주시고 나서 하신 말씀 곧 유다와 이스라엘이라고 쓴 두 막대기를 하나로 붙들고 있으라는 말씀을 읽은 후에 이 두 판을 붙여 하나의 십자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26백년전 하느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의 상황으로 옮긴 것이다.


     그런데 이 세 품목들은 우리가 주겠다고 한 것이 아니라, 전시 담당자 큐레이터가 직접 교회를 방문하고 나서 요청을 한 것이다. 그는 본래 향린교회의 국악예배를 세계교회에 소개하려는 마음을 품고 왔었는데, 교회에 와서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나서 국악찬송가와 함께 이 세 품목을 요청해서 가져갔고 지금 베를린의 정부 소유의 건물에서 전시되고 있다. 이는 향린교회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기장의 자랑이며 한국교회의 자랑이고, ‘저항하는 자들이라는 본래성을 드러낸 Protestants(세계 개신교)의 자랑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이제 3주가 지나면 향린교회에서 사임을 하게 된다. 아직 자원은퇴의 나이가 차지는 않았지만, 정관 규정에 따라 7년 임기의 중임을 마치게 된 것이다. 1993년 향린교회는 창립 40주년을 맞아 교회 개혁의 한 일환으로 목사장로 임기제를 실시하여 오고 있다. 몇몇 교회들이 이를 도입하고 있지만, 교회를 향한 세간의 비판은 점점 거세지고 있다. 지금 한국교회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는 표류하는 배와 같다. 성장의 최고점을 치고 하락세로 돌아선 여전히 이를 뒤집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나의 목회경험에 비추어 볼 때, 이는 분명 역사의 가르침을 거역하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보이지 않는 교회는 영원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세상 교회는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다. 세상의 변혁자로 나아갈 때, 교회는 성장하지만, 세상과 한패가 될 때 교회는 타락하고 그리고 쇠퇴하는 것이 역사가 우리가 가르치는 교훈이다.


     나는 중 1 때 부모님의 기도를 따라 기장 목사였던 할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3대째 목사가 되겠다고 희망 직업란에 기입을 한 이후, 교회는 나의 의식적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왔다. 그러나 난 교회지상주의자가 되기를 거부해 왔다. 그건 예수께서 보여준 성전숙청(해체) 사건에 기초한 나의 신앙고백이고 이 땅에 건설되는 하느님 나라와 기독교왕국(christendom)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한신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한신은 단지 나의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나의 삶의 전부라고 해도 좋다. 난 한신에 대한 깊은 자부심을 갖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 이번 호의 주제가 루터의 500주년을 기념하는 주제이기에 내가 생각하는 오늘의 루터의 개혁운동의 과제는 루터가 성서를 신도들에게 돌려주었듯이 오늘의 한국교회는 목회를 신도들에게 돌려주어 목회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일이다. 나는 향린교회에 부임한 이래 평신도설교(생활목회자 하늘뜻펴기)를 주일예배시에 매년 십여 차례 행해 왔고, 함께 손잡고 기도하는 공동축도를 오랫동안 시행하여 왔다. 그리고 부서장과 신도회장으로 구성되는 목회운영위원회를 통해 교인들이 목회 전반에 참여하도록 하고 있다.(재정과 단기적 과제는 목회운영위원회가 인사와 예배 및 장기적 과제는 당회가 분리하여 담당하고 있다. 목회운영위원회에는 당회 과반수가 참여하고 있다.)


     끝으로 한마디를 덧붙이고 싶다. 원고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는 오늘 새벽 4시 대선토론과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사드무기를 미군은 8천명의 전투경찰을 투입한 끝에 성주 소성리 롯데골프장으로 모두 옮겼다. 이 과정에서 2백여 명의 나이 많으신 주민들은 물론 원불교의 교무님을 비롯한 평화지킴이들이 많이 다쳤으며 이 가운데에는 향린교회 여교우 한분도 포함되어 있다. 박정희는 유신헌법을 통과할 때, 야당국회의원들을 따돌린 채, 한밤중 어둠 속에서 통과시켰다. 이들 또한 어둠을 틈타 무기를 운반해왔다. 어둠 곧 사탄의 자식들이다. 지금 한반도 주변에는 한국군과 미군의 실질적인 통치자인 트럼프가 보낸 세 대의 핵 항공모함과 150개의 미사일이 장착된 핵잠수함이 배치된 상태 속에서 한미군사훈련이 계속되고 있으며 제2의 한국전쟁을 부추기고 있다. 군작전통제권을 빼앗긴 군 식민지 상황에서 이 울분을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향린공동체 4개 교회(강남향린, 들꽃향린, 섬돌향린, 향린)는 다음 주일 이곳 소성리로 가서 현장주일예배를 드리기 위해 한 달 넘어 준비 중에 있었다. 물론 우리는 무기 운반이 끝났다고 해서 우리의 기도 행진을 중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평화를 일구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 하느님의 딸과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한신은 나에게 이 땅의 평화를 위한 일꾼이 되라고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