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향린교회 입당감사예배(2016.5.19)

교회의 태동과 본질(2:1-8, 14-18)

 

(3년 전 김석채전도사님의 아내 이은숙집사님께서 이 장소에서 옷가게를 열었을 때에 심방을 왔었는데, 오늘 와서 보니 내부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참으로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치하를 드립니다.)

 

[인생과 목회]

 

크게 보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길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주위 사람들 곧 세상이 말하는 성공의 길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과의 물음 속에서 자기만의 고유한 길을 찾아가는 인생입니다. 이 두 가지 길은 신앙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믿는 신앙의 행태를 따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믿음의 이해도 기도의 방식도 남이 하는 방식을 쫓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만의 달란트를 충분히 발휘하는가는 의문입니다. 반대로 물음을 갖고 자기 확신을 찾을 때까지 계속 질문하고 탐구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위의 성장하는 교회를 따라가는 목회가 있습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일년에도 몇 차례씩 교회성장 세미나에 참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들을 때는 쉬워 보여도 자기 교회에 적용하려고 하면 반대도 많고 환경이 달라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목사를 따라 이 프로그램을 채택하고 저 목사를 따라 저 프로그램을 채택하다가 결국 제 풀에 쓰러집니다. 열 개의 교회가 개척을 해도 3년이 지나면 평균 3개의 교회만이 남는다고 합니다. 이제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교회의 성장이 멈추었고 감소 추세로 변한지 오래되었고, 목사들이 그렇게 성장세미나를 쫓아다녀도 목회 성장이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 요즘은 그런 교회성장세미나 열풍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부흥회라는 현수막도 이제는 많이 보기 힘듭니다.

 

[본질에 충실한 교회]

 

최근 작은 교회라는 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교회를 크기가 아닌 내용으로 채우려는 젊은 목회자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매우 고무적인 현상입니다. 저는 김석채전도사님께서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고 믿고 또 굳이 향린이라는 이름을 자신이 개척하는 교회에 붙이겠다고 하는 뜻 또한 본질 내용에 충실한 교회, 다른 교회의 목회 방식을 쫓아가는 목회가 아닌 자신의 달란트에 맞는 목회를 추구하여 보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교회의 문자적인 의미는 교를 믿는 회중 혹은 무리를 말합니다. 교회당(敎會堂)하여 집 당()자를 쓰면 건물이 되겠지만 교회하면 건물을 반드시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무슨 교회라고 간판을 붙이다보니 교회가 건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친교를 나누고 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건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오래 전 책에서 읽은 바로는 미국 텍사스에 있는 어느 미국인 교회는 교인 숫자가 한 천여 명이 되는데, 50여개의 가정교회 형식으로 되어 있어 주일예배는 각 가정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고 일 년에 몇 차례 극장이나 학교 같은 곳을 빌려 연합예배를 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헌금은 선교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 건물이 있으면 좋지만, 주일에 한번 사용을 하는 건물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이 높다면 그래서 교인들이 내는 헌금의 상당액수가 교회 건물 유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면, 이것이 교회 본질에 맞는 교회인가는 의문이 듭니다.

 

가정의 예에 비추어 보면 보다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이민교회를 섬기면서 자주 보았던 경우인데, 세탁소나 마켓이나 부부가 한 10년 열심히 일해 아주 좋은 집을 마련합니다. 그런데 매달 모게지를 내기 위해서 두 사람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전에 아파트에 살 때나 새 집에 살 때나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하숙집과 같이 밤늦게 들어가 잠만 자고 나옵니다. 그러다가 병이 들어 쓰러지는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정원이 있지만, 즐길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가 내는 은행 융자 이자 비용만 10조원이상이라고 합니다. 큰 교회들이 보통 수천만 원씩을 내고 있거나 이자를 내지 못해 은행으로 넘어가는 교회가 많으니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인 헌금의 상당액을 은행 융자 이자 금액으로 바치는 것이 과연 이것이 예수께서 원하시는 모습인지 아니면 말은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맘몬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하느님의 통치]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음의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교회보다 상위 개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게 하는 이 땅에서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건축을 하기 위해 가건물을 짓는 경우가 있는데,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종의 가건물입니다. 지금 이 예배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전도사님께서 상당한 수고를 하였는데, 이는 하느님 나라를 위한 가건물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들 가운데 하느님의 나라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너희들 가운데는 믿는 사람들의 모임을 말하는 것이지 건물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헬라어 Basileia tou Theou'하느님의 나라'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문자적 번역이지 그 내용을 정확히 전달하는 번역은 아닙니다.

 

오늘날은 나라 사이에 국경이 분명하지만, 2천년 전에는 국경이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의 말이 전해지고 시행되는 그곳까지가 그 나라의 왕국이었습니다. 곧 하느님의 나라란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실행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곧 지리적 공간의 의미보다는 통치라는 현재적 시간의 의미가 더 큽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말보다는 하느님의 통치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회개하십시오. 하느님의 통치가 가까웠습니다.’ 이 말이 훨씬 더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보이는 교회 보이지 않는 교회]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데, 여기 공회(公會)가 뭡니까? 한자어로는 공적 모임이라는 뜻인데, 그러면 왜 교회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건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이 땅의 건물로 존재하는 교회가 아닌 보이지 않는 우주적 교회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catholic 이라고 합니다. 영어 사도신조는 I believe in holy catholic Church.입니다. 이때의 가톨릭의 의미는 보편적 혹은 유일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교회도 영어로는 가톨릭이라고 부르는데, 그때에는 영어로 대문자로 써서 구별합니다.

 

2천년 역사에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사라졌습니다. 고린도교회나 에베소교회, 서머나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지금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건물로 말해지는 보이는 교회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지금은 수만 수십만 명이 모여도 대체로 백년 이백년이 지나면 대부분의 교회들은 건물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40년 전 제가 신학생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교회는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Crystal church였습니다. 대형 유리로 지어진 교회와 로버트 슐러목사는 모든 개신교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교회성장에도 큰 바람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차에서 영화를 보는 드라이브 인 극장처럼 자동차에 탄 채로 예배를 드려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슐러목사가 은퇴하고 교인들이 줄어들면서 빚 감당을 하지 못한데다, 자식들끼리 권력다툼을 하더니 지금은 남미사람들의 Catholic 성당으로 변했습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

 

왜 그렇게 되었을까? 저는 교회의 본질에서 어긋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서 특히 초대교회의 역사인 사도행전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선 부활 예수께서 승천하신 이후 제자들은 예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씀을 믿고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를 합니다. 열흘째가 되는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 하늘의 거룩한 영이 임하여 저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입이 열립니다.

 

소위 말하는 방언의 능력이 생기는데, 이때 그들이 경험한 방언과 우리가 말하는 방언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곧 처음 방언은 달리 통역이 필요 없이 말이 다른 모든 민족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듣게 되는 외국어 방언이었고, 고린도교회 혹은 요즘 교회에서 말하는 방언은 일반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 들을 수 없는 그래서 통역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통역을 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신비의 언어를 말합니다.

 

오순절 처음 터진 방언은 일반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말이 아니라,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복음의 내용을 알아듣는 대화와 소통의 언어였습니다. 바벨탑 심판으로 인해 흩어졌던 언어를 하나가 됨으로 모든 민족이 소통하게 되는 화해의 언어였습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서 세상을 향해 하늘의 뜻을 전하는 곳입니다. 그런 점에서 양평향린교회는 인문학 책읽기를 통한 카페를 주중에 운영함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둘째는 저들이 다락방 안에 머물지 않고 거리에로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는 노방전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목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교회 문을 열고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으로 모이는 것은 예배와 교육, 섬김의 훈련을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흩어지기 위해서 모이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착각하는 것이 교인을 교회 안에 붙잡아두는 것이 목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목회의 목표는 교인들이 세상에 나아가 세상을 바꿈으로 하느님의 통치가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일이지, 세상의 도피처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교회를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 예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 아들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이 반드시 교회에로 나아오라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바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했을 때는 해당이 되겠지만, 그렇지 아니한 경우에는 아닙니다.

 

오히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께서는 성전 숙청 이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부활의 몸으로서의 예수님은 성전 밖에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양평 향린교회는 성전 밖에 있는 가난한 민중들 속에 거하시는 부활 예수를 증언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자들]

 

세 번째 사도행전에서 배우는 교회의 본질은 성령에 능력에 사로잡힌 사도들이 거리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외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당시의 권력 집단으로부터 핍박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의 역사는 핍박과 순교의 역사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옥에 갇히고 스데반은 순교를 당합니다. 단순히 유대종교지도자들에 의한 종교 핍박만이 아닙니다. 옥에 갇혔다는 말은 로마의 국가 권력에 의해 핍박을 받은 것입니다. 저들의 죄목은 민심 소요죄입니다. 바울과 실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빌립보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시민들로부터 고발을 당합니다. 죄목은 세상을 소란스럽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대교인들은 어딜 가나 세상을 소란케 하는 사람들이라고 고발을 당하였지만, 오늘날 교회는 세상과 짝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습니다. 축복받아 부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세상과 짝하기를 원합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좁은 길을 갔지만,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넓은 길을 가고자 합니다.

 

저는 양평향린교회가 그 이름이 뜻하는바 양평에서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향기는 단지 사람들의 코에 좋은 샤넬5와 같은 그런 향기가 아니라 세상의 잘못을 지적하고 부패를 드러냄으로 소동을 불러일으키는 교회로 소문이 나기를 원합니다. 변혁의 향기를 품어내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헐벗고 로마의 압제와 착취로 집을 떠나 거리에서 방황해야 했던 갈릴리의 민중들과 함께 하느님 나라 운동을 하셨듯이 양평향린 교회 또한 오늘의 아픔을 당하는 민중 속에 함께하는 현장으로서의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양평향린교회가 시장 한 가운데 위치한 것은 하늘이 내린 처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예배 처소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세상 변혁을 향한 근원지 곧 마가의 다락방이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미 밖에 붙인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라는 현수막으로 인해 양평향린교회는 벌써 변화를 향한 소동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프란체스코 교황이 말한바 교회는 세상 속에서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라는 말은 이미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자 사도행전이 전하는 말씀의 핵심입니다. 이 예배 처소가 만민이 기도하는 집, 목회자 개인의 뜻이 아닌 주님의 뜻을 이루는 참다운 성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하박국선지자의 말씀으로 하늘뜻을 마치고자 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야훼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느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