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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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와 광장
목요촛불기도회(2015.9.3.) 광화문세월호광장
마 11:2-9
성서에서 광야는 하느님의 역사와 말씀이 펼쳐지는 거룩한 공간이다. 모세가 야훼 하느님을 만난 곳이며, 모세가 성서의 기초가 되는 하느님의 율법을 받은 곳이며, 도망자 야곱이 하늘로 연결된 거룩한 성소가 있었던 곳이며, 엘리야가 절망한 나머지 죽음을 자청하다가 하느님의 세밀한 음성을 듣고 새롭게 거듭난 장소이며, 바벨론의 포로로 붙잡혀 살아가던 에스겔이 마른 뼈들이 거대한 군대로 변하는 환상을 본 부활의 장소이며 세례 요한이 백성들에게 회개의 말씀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던 곳이며 예수께서 금식을 하며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아들로 변화된 장소이다.
동시에 광야는 하느님의 역사와 말씀이 들려지고 이루어지는 거룩한 시간이다. 광야에 나간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을 머물렀다. 40년은 훈련과 각성의 시간이었다. 모세 또한 40년을 미디안광야에서 머물며 양떼를 돌보았다. 이 시간은 자신을 낮추고 하느님의 뜻을 깨닫기 위한 각성의 시간이었다. 엘리야는 광야 40일을 걸어갔다. 예수는 40일을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하셨다. 사람들은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광야로 나아갔다. 히브리어로 광야는 므드바르인데, 므는 장소 접두어이고 드바르는 말씀 혹은 율법으로 번역된다. 곧 광야는 하느님의 말씀이 펼쳐지는 장소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말하는가? 하느님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실망한 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아픔을 당한 자들에게 위로를 주기 위해 주어진다. 곧 광야는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 아니라 아픔을 겪고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시간과 공간을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광야는 어디인가?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는 시공은 어디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아프다.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아픔이 보다 진실이 되려면 많은 사람들이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공감할 수 있는 아픔이다. 곧 사회적 아픔이요, 권력에 의해 눌리고 찢겨진 아픔이다. 광장은 21세기 남한 땅에서의 광야이다. 특히 304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의 아픔을 지니고 있는 광화문 세월호 광장은 더욱 그러하다.
도대체 500일이 넘어가도록 3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간 그 원인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그리고 그 안에 9명의 시신이 있는데도 이제야 인양작업을 시작하고 있고 언제 이 작업이 마쳐질는지 그 과정조차도 알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희생자 가족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국민의 알권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인해 이 배의 실소유주가 국정원인 것은 물론이고 이 참사의 원인에 대해 끊임없이 해명할 수 없는 질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고, 진상규명위원회는 아예 시작부터 구성 자체부터 절름발이로 만들어버렸다. 이는 국가의 조직적인 은폐공작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세월호는 제주 43항쟁, 여순항쟁, 419와 부마항쟁, 광주 518항쟁과 87년 6월항쟁에서 희생당한 사람들과 같은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자들이다.
오늘 국가권력의 횡포를 비판하였다고 해서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고, 그는 예수가 자기가 기다려온 메시야인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합니까?’ 이에 예수는 ‘너희가 듣고 본대로 요한에게 가서 말하라고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 지는 일이다.’ 여기서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한다면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걷고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사건은 종합병원을 가보면 그런 일들이 일어난다.
우리는 종합병원에 가서 의사들이 행하는 여러 치유들을 보면서 그게 메시야 사건으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는 변화에 대한 은유이다. 개인적 사건이 아닌 사회적 변화에 대한 은유이다. 그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사건. 이는 간혹 세계 뉴스에 등장하는 이야기이지만, 이것 자체가 메시야 사건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복음이란 무엇일까? 빵한조각일까?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생겨난 이유는 간단하다. 로마제국과 그의 허수아비 정부 헤롯이 갈취해간 세금착취 때문이다.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세금포탈을 견디지 못해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만 했다. 5천명 급식기적 이야기의 배경이 그렇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란 곧 한끼의 식사가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가난의 질곡으로 내어몰고 고향을 떠나도록 내몰았던 로마제국과 헤롯 권력의 몰락이다.
세례 요한은 바로 이러한 국가폭력에 의해 옥에 갇혔고, 메시야가 오면 하느님의 나라가 오고 그래서 세상 종말이 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와 관점이 다르다. 세례 요한은 그런 사건이 세상 파국을 통해 급작스럽게 이루어질 것으로 본 반면 예수는 민중들이 각성함으로 일어나는 점진적인 하느님 나라 건설을 생각한다. 곧 세례 요한은 민중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곧 민중이 객체가 되는 새로운 역사를 기대했지만, 예수는 민중이 스스로 역사의 주체가 되는 하느님 나라 건설이다.
예수는 당시 세례 요한을 따라 다닌 사람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그렇다. 너희는 예언자를 보러갔다. 그런데 일찍이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어떤 사람도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없다고 말한 다음에,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이 사람보다는 크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하신다. 곧 세례 요한의 시대와 예수 시대의 차이가 그렇게 큰 것임을 말한 것이다. 세례 요한이 위대한 인물인 것은 맞지만, 그는 구시대의 인물이다. 예수는 그런 구시대와는 다른 획을 긋는다. 그건 하느님 나라 건설에서 우리 스스로가 주체임을 깨닫는 일이다.
11장 12절 말씀은 해석하기가 상당히 힘든 구절이다.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개역) 세례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해 왔다. “그리고 폭행을 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공동)폭행을 정당화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무력하게 폭력을 쓰는 악의 세력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하느님의 나라가 침범을 당한다는 말을 부정적으로가 아니라 긍정으로 해석을 하여 곧 역사의 주체자로 나서는 민중들에 의해 하느님의 나라가 점령된다는 말로 해석한다. 곧 하늘나라는 깨닫는 자들의 것이고 이는 민중들의 역사주체적인 혁명 달리 해석하면 강압적인 힘에 의해 건설된다는 말이다.
여전히 해석의 여지가 남아 있지만, 우리는 거리기도회를 통해 민중들이 억울하게 당하는 아픔과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과연 이런 모순과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일까를 고민한다. 거리에서 드려지는 우리의 기도와 교회 건물 안에서의 기도는 과연 어떻게 다른 것인가? 예수는 왜 시몬이나 안나와 같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기도하지 않고 광야에 나가 기도를 한 것인가? 왜 많은 하느님의 사람들은 꼭 광야로 나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야 했던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광야의 깊은 뜻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우리가 광장에 모인 이유는 갈대를 보기 위함도 아니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기 위함도 아니다. 거리에서 흘려간 수많은 민주와 노동의 열사들을 본다. 거리는 빈공간이다. 인위가 가득한 곳에서는 하느님이 설 자리가 없다. 그러나 빈 공간에서 하느님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신다.
이제 2015년 또 다시 9월을 맞아 새롭게 시작하자. 5년 전 2010년 처음 거리기도회를 시작했던 그 각오와 헌신 그리고 하느님 사랑과 민중 사랑의 마음으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