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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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알의 소리 11,12월호 2013년
세계교회협의회 부산 총회를 참석한 소회
조헌정
지난 10월 30일부터 11월 8일까지 부산에서 역사적인 세계 교회 모임이 있었다. 1948년 창설되어 7년에 한번 대륙별로 장소를 옮겨 모이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 10차 총회가 모인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인도에 이어 두 번째 주최국이 된 것이다. 이는 2,3백년에 한번 그 기회가 돌아오는 모임이다. 세계 140여개국, 350여개 교단 공식대표 830여명을 비롯하여 외국인 등록자 2,000여명 국내등록자 6,000여명이 함께 한 개신교의 최대 모임이다. 총회라는 이름으로 모이긴 하지만, 축제 성격이 훨씬 강한 모임이다. 흔히 WCC를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 부르는데, 이는 “온 지구상에 거하는 만물”(All Inhabitants on Earth)을 뜻하는 ‘오이쿠메네’(οικουμενε)라는 성서 희랍어 단어에 기초하고 있다.
필자는 WCC의 지부격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이하 NCCK)의 화해통일위원장으로서 한반도평화통일분과의 어드바이저로 참석하였다. 필자는 1990년 서울에서 모인 WCC 주관 ‘정의와 평화, 창조보존’(Justice, Peace & Integrity of Creation)이라는 지구자연 환경문제를 다루었던 특별대회와 7년 전 브라질에서 모인 9차 총회에 옵서버로 참여한 경험이 있으며, WCC 산하 국제회의에 여러 차례 참여한 경험이 있다. 이 글은 총회 참석의 보고라기보다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가 다분히 담긴 소회(素懷)의 기록이다.
[WCC 비판과 오해]
한국교회는 짧은 기독교 역사에 비해 급작스럽게 성장한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 130년 선교역사(천주교는 230년)에 현재 약 15-18%에 달하는 개신교인과 10%에 달하는 천주교인이 있다. 이를 합치면 전체 인구의 4분지 1에 해당한다. 세계 50대 교회 중에 절반이 서울에 있다. 이런 급성장의 배경에는 두 개의 시기가 있다. 첫째는 선교초기 1907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흔히 이 시기를 교회사가들은 평양을 중심한 회개운동의 결과라고 말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말하면 이 시기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노골화된 시점으로 서구 기독교를 하나의 피신처로 여겨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둘째는 60년대에 일어난 수출주도형 공장으로 몰려온 곧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갖는 심리적 불안감과 이와 더불어 교회들이 개인의 물질 욕망을 부추긴 결과이다. 요즘은 경제성장의 한계 그리고 시민비판정신으로 말미암아 교회들이 한계에 부딪혀 있고 대형교회들의 세습이나 목회자들의 윤리적 탈선 등등의 문제로 교회는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현재의 노년층 교인들이 자연감소하게 되면 쇠락은 필연적이다. 이는 현대인들의 반종교적인 경향 때문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난 10년 동안 남한 개신교회는 감소하는 반면, 천주교와 불교는 계속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북반부 교회들이 쇠퇴하고 있는 반면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지역의 남반부에서 교회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남한교회의 쇠락의 근본 원인은 반공이념과 숭미라는 이데올로기화한 보수 신앙의 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 글 말미에 다시금 언급하겠지만, 바로 이런 폐쇄적 신앙으로 인해 이번 총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믿기 어려운 폭력적 행동들이 일어난 것이다.
WCC에 대한 오해와 반대는 남한교회가 유독 심한데, 단일교회운동, 용공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라는 비난이다. 단일교회운동에 대한 비판에 대해 “WCC는 단일교회(super church)도 아니고, 세계교회(world church)도 아니고, 사도신경에서 말하는 “하나의 거룩한 교회(Una Sancta)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단지 “회원 교회들이 서로 접촉하고 그리하여 교회 일치 문제에 대한 연구와 토론을 촉진하도록 하는데 있다. 회원이 된다고 해서 교회 일치의 본질에 관한 어떤 특정한 교리를 수용해야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는 용공주의에 대한 오해이다. WCC는 1948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를 중심으로 냉전체제가 굳어지자, 세계평화를 위해 시작했다. 이때 소련이 정교회나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의 교회와도 대화를 지속하였는데, 이를 오해한 결과이며 특히 남한은 6,70년대 박정희군사독재정권 하에서 WCC가 남한의 인권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원을 하였는데, 이때 군사정부가 용공주의 단체로 몰았던 것이다.
세 번째는 종교간에 평화없이 세계평화는 불가능하다고 하는 믿음 아래 WCC는 세계의 여러 종교 지도자들과 대화하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이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음을 인정하는 다원주의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다른 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다수는 각 종교간의 특성을 상호 인정하는 열린 입장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남한의 대다수 보수교회들은 이웃종교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16세기 서구교회가 그러했듯이 강압적인 식민지식 포교를 전도나 선교의 바른 방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필자는 유독 남한교회만의 극단적인 보수화는 남북분단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전시작전통수권이 없는 분단구조는 계속하여 미국으로부터 신무기를 사들일 수밖에 없도록 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외치면서도 동시에 북이 멸망하기를 바라는 이중적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게 만들고 있다. 매카시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 천안함이나 NLL과 같은 문제에 합리적인 물음조차 차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 사후 초대교회를 보면 가진 것을 모두 내어 놓고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었다. 이는 분명 함께 소유하고 함께 나누는 공산주의 이념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남한의 많은 교회들이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말하지만, 이러한 공동소유와 나눔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왜냐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이다. 공동소유와 나눔은 인류가 지향하는 이상사회의 모습이지만, 남한에서만은 빨갱이 사상이 되고 만다. 교회가 절름발이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명 예수는 로마를 비롯한 여러 제국들의 지배에 가장 강하게 저항하던 갈릴리의 억눌리고 가난한 민중들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저들이야 말로 다가오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주인임을 가르쳤고 당시 절대로 여겨지던 율법의 재해석과 예루살렘 성전 숙청을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유대종교권력자들의 모함으로 로마의 지배를 거부하는 정치범들에게만 시행하던 십자가처형에 죽임을 당했던 것이다. 이 십자가 처형 안에 담긴 자유와 해방을 향한 변혁과 저항의 복음의 본질은 거의 사라지고 오직 개인의 영혼구원만을 강조하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변질된 구호만이 외쳐지고 있다.
WCC는 사회에 대한 복음적 입장을 분명히 밝혀 왔다. 예를 들면 1954년 제2차 에반스톤 총회에서는 인종주의와 식민주의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때 총회는 “인종, 피부색, 종족을 근거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복음과 교회의 본질에 위배된다.”고 선언했고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Apartheid)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또한 히틀러의 나치주의에 대한 독일 고백교회의 바르멘선언(Barmen Declaration) 또한 복음의 정치적 해석이 아닌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복음의 신앙고백임을 분명히 하였다.
2주 전 천주교의 정의구현사제단 전구교구가 행한 시국미사에서 ‘박근혜정권 퇴진’을 말하자 이에 대해 여당과 청와대는 종교의 정치 개입이라고 크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불의한 권력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예언자적인 외침은 성서의 핵심이다. 히브리성서(구약)는 노예로 살아가던 히브리인들이 애굽제국의 지배로부터 탈출하는 엑소도스로부터 시작한다. 노예의 해방사건은 정치적 사건이지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 왕국시대에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국가권력을 비판함으로 핍박을 받았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과 십자가 처형 사건은 종교적 사건이 아닌 정치적 사건이다. 복음서 저자들이 유대인들의 독립운동으로 말미암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로마제국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종교적 각색을 했던 것이다.
[평화열차]
한국교회의 입장에서 본 이번 세계총회의 백미는 베를린 브란데부르크 광장에서 출발하여 모스크바와 이르쿠츠크, 북경, 단동을 거쳐 인천 서울 부산으로 이어지는 23일간의 평화열차이다. 이는 본래 WCC의 공식행사로 시작하지는 않았고, NCCK가 주관한 행사였지만, 130여명의 참가자중 절반이 15개국에서 온 외국인들로 후에 총회 석상에서 그 기록영상물이 두 번이나 방영됨으로 공식화되었다. 독일교회와 러시아정교회와의 협력아래 세미나 등 다양한 행사를 가졌다. 본래 평양을 통과를 위해 NCCK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이를 타진하여 왔고, 그때마다 북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얻었다. 그리고 조선그리스도교연맹으로부터 이를 위한 협의를 위해 두 번이나 공식적인 초청장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남북경색의 이유로 통일부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 성명서]
총회의 핵심 모임에 Ecumenical Conversation 이라는 21개의 주제별 모임이 있었다. 이는 4일간의 집중적인 토론을 통해 이 결과를 총회의 공식문서로 발표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한반도평화와 통일에 관한 것이었고, 필자 또한 발제자 중에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세 장 길이에 달하는 성명서가 총회 폐회 하루 전 뜨거운 박수로 채택이 되었다. 여기에는 외세에 의한 분단의 역사와 통일의 당위성 그리고 WCC가 그간 남북교회의 만남을 위해 노력했던 일들과 NCCK가 주관했던 여러 일들이 얘기되었고, 이후 현재의 교착상태인 남북교회의 만남과 화해 통일을 위해 WCC 회원 교회들의 구체적인 실천 사항들이 열거되어있다. 그중 획기적인 것은 한반도 지역에서의 국제적인 군사훈련을 중지하고 북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을 철회하라는 것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라는 요구이며 이를 위해 회원교회들이 기도하고 노력한다는 사항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미스런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봉쇄정책 철회와 평화협정 전환이라는 문구를 빼라는 청와대의 압력이 들어온 것이다. 이는 WCC를 무시하는 무례하고도 불쾌한 일이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생겨난 것이다. 담당 국장으로부터 이 얘기를 듣고 나는 매우 부끄러웠다. 권력의 종교간섭이라는 6,70년대 박정희독재정권의 사고방식이 다시금 생겨난 것이다. 그래 압력을 견디지 못했던지 아니면 평소 생각이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총회 영접위원장이었던 K목사가 총회를 마치는 감사의 인사를 올라간 자리에서 ‘한국교회는 박근혜정권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북에 대한 경제봉쇄정책을 지지한다’고 하는 총회의 결정을 뒤집는 개인 발언을 하고 만 것이다. 이는 정부의 개입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추악한 장면이자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 웃음거리가 되고 만 사건이다. 이를 다룬 기사의 제목과 같이 ‘자기가 차린 밥상을 스스로 뒤엎는’ 매우 몰지각한 일이었다.
[임진각 방문과 총대 6명 교회 방문]
이번 총회의 또 하나의 특별한 행사는 주말을 맞아 총대들이 임진각을 방문하고 여러 교회에 흩어져 한국교인들의 집에 하루 밤을 머무는 일이었다. 필자가 시무하는 향린교회에도 6명의 외국인 총대들이 교인들의 집에서 머문 후 주일예배에 참여하였다. 이때 총회가 개회예배시에 가졌던 총회의 공식 5개국 언어로 된 각 대륙별, 지역별의 기도문을 나눠주고 이를 재현하였다. 향린교회는 국악예배라는 점 때문에 자주 외국 교인들이 참석을 하고 있지만, 6명의 총대들과 교인들이 돌아가며 세계가 안고 있는 여러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기도함으로 세계적 안목을 갖게 된 귀중한 시간이었다.
[마당과 국악예배 워크샵]
총회 기간 중에는 일반 사람들이 참여한다 하더라도 볼거리가 무척 많았고, 배울 것도 대단히 많았다. 마당이라는 전시장을 통해 근 100여개의 다양한 주제들이 책자나 소품 전시를 통해 소개되었고, 특히 태평양 지역의 교회들이 보여준 민속춤과 노래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워크샵을 통해 회원교회들의 다양한 주제와 관심들이 제시되었는데, 한국교회가 주최한 것으로는 정신대, 관동대지진 학살에 관련한 것이 있었고, 특이한 사항으로는 남한에서의 원전을 반대하는 목회자들이 고리원전 앞에서 40일간의 연속단식에 이어 총회 기간 동안에는 다른 나라의 총대들과 함께 원전 반대 촛불기도회를 갖기도 했고, 전시장 안에서는 이를 알리는 천막을 치기도 했다. 후쿠시마 원전폭발 사건 이후 세계 3위의 원전국이면서 세계적 추세와는 정반대로 움직이는 남한 정부에 대한 시책을 고발하고자 한 것이다.
또 하나의 특색 있는 워크샵은 필자가 섬기는 향린교회가 담당한 ‘국악예배 소개와 에큐메니칼 영성 연대’라는 것이다. 한 교회가 워크샵을 담당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진행된 총회에서 20년간의 노력이 담겨 있는 국악예배는 세계교회가 간절히 바라던 바였다. 보통 30명에서 50명 정도 참여하는 워크샵이지만, 국악예배 워크샵에는 내외국인 200여명이 참석을 했다. 한 외국인 참가자는 마치 천국에 다녀온 느낌이라는 발언도 했고, 북유럽 참가자는 지금 진행 중인 찬송가 편집에 국악찬송 하나를 넣겠다는 얘기도 들었다. 전통음악이 단순히 공연 차원이 아니라, 교회 음악을 통해 세계화되어가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소수자 우선 정책]
WCC는 소수자 우선 정책을 갖고 있다. 여성과 청년 대표를 각각 30%를 갖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열흘간의 총회에 앞서 여성 장애인 청년 원주민(이주민)의 4그룹들이 먼저 3일간의 공적인 대회를 갖도록 하고 있다. 필자 또한 미국에서 한국인교회를 섬길 당시 소수자 우선정책에 따라 영어나 미국교회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했지만, 백인이 95%를 차지하였던 장로교 총회 위원회에서 일하기도 했고 동양인 목사로서는 처음으로 수도노회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한국교회의 여성이나 청년 리더쉽의 부족은 심각한 상태이다. 신학대학의 학생들의 여성 비율은 절반에 가깝지만, 목회자 안수 비율은 현저히 떨어지고 총회에 가보면 청년은 0%에 가깝고 여성 또한 겨우 10% 정도이다. 이 또한 강제 비율을 적용하기 시작한 최근의 일이고 가장 진보적이라는 기장 교단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보수적인 교단들은 아예 장로와 목사 안수마저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교회들일수록 여성 교인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다. 남성 지도자들에게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 여성들 또한 양성평등 원칙이 실현되도록 더욱 분발해야 할 것이다.
[안타까운 얘기 1]
정사(正史)가 있다면 기록에 들어가지 못하는 야사(野史)도 있다. 그러나 정사를 바로 이해되려면 야사가 있어야 한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야사이다. 처음부터 총회는 삐걱거렸다. 왜냐하면 NCCK를 중심한 교회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후에 유치를 결정한 총회가 아니라, 몇몇의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짧은 시간 안에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본래 이번 총회는 2천 년 전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명칭이 시작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었다. 그런데 남한교회가 갑자기 유치경쟁에 뛰어들었고, 남북분단이라는 정치적 상황과 다종교의 사회 그리고 WCC 재정 곤란을 남한교회가 상당부분 담당하기로 하고 유치를 하게 된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남한 교회가 돈으로 총회를 사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얘기들은 다 말하기가 힘들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를 위해 남한정부로부터 재정 보조를 받게 되었고 그러자 자연히 현재의 보수 정권과 연계되어 있는 한기총이라는 보수교회 단체로부터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한기총 대표 H목사와 WCC 준비위원장 K목사의 주도 아래 WCC에 대한 한국교회의 의심을 풀기 위해 짧은 신학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에 NCCK 총무까지 서명하는 일이 생겼다. 이는 ‘다양성 안의 일치’라는 WCC의 에큐메니칼 신학을 부정하는 일이었기에 필자를 포함한 여러 신학자들과 단체들이 이를 비판하게 되었다. 비판에 직면한 총무는 이것이 잘못된 판단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이를 번복하자. H목사와 K목사는 다시금 이를 확인한다 하면서 여러 목회자들이 함께 하는 어수룩한 서명 절차를 다시 갖기도 했다. 이로 인한 진보와 보수 진영 간의 신학논쟁 후유증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안타까운 얘기 2]
총회 유치와 관련하여 하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만약 애초 WCC가 의도했던 대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총회 장소가 결정이 되었으면 지금과 같은 시리아의 내전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역사의 가정이다. 다마스커스로 결정이 되었다면 당연히 WCC는 내전 방지를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현재 3년동안 지속되고 있는 시리아의 내전은 영국, 불란서, 미국이 반군에 무기를 제공함으로서 유지되고 있다. 이 세 나라는 소위 말하는 기독교국가로서 일정부분 교회가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나라들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총회장소가 다마스커스로 결정되었다면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수십만의 사상자와 수백만의 피난민들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결코 반복되어서는 안 되는 내전을 겪었던 우리로서는 못내 아쉬운 역사의 한 단면이다.
장소 또한 마찬가지이다. 한반도의 남쪽 끝인 부산으로 결정한 것도 특별한 이유가 없다. 벡스코라는 남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국제회의장 시설과 그 주위에 있는 세계 최대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다고 하는 S백화점과 필자와 같이 국제경험이 많은 사람도 눈이 동그라질 수밖에 없는 거대한 H매장을 비롯한 즐비한 쇼핑상가 거기에 해운대의 최고급 호텔들이 부산으로 선택된 이유였다. 편리와 욕망이라는 시장자본주의적 입장에서 선택한 장소였다. 역대 총회는 대체로 작은 도시의 대학교 시설을 이용하여 진행하여 왔다. 이렇게 비싼 시설에서 해야 할 이유가 뭐냐고 하는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총대들의 불만은 당연한 것이었고, 백억이 훨씬 넘는 예산을 투여하고서도 십억 가까운 빚을 지게 된 것도 당연한 결과이다. 역대 총회 중 가장 호화스런 총회였다.
남한 전체를 지역적으로 고려하여 중앙에 위치한 대전을 정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참여했을 것이고 지난 총회에서와 같이 역사적 의미가 있는 도시를 찾아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를 정했더라면 훨씬 그 의미가 컸을 것이다. 부산은 교회로만 본다면 보수화가 가장 심한 곳이다.
[안타까운 얘기 3]
총회가 열리기 몇 달 전부터 보수교회들의 반대 운동이 극렬하게 진행되었다. 반대 거리 서명이 곳곳에서 진행되었고, 총회 전날 오후에는 벡스코 근처에서 경찰 추산 1만 오천 명에 달하는 보수신앙인들이 수십 대의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반대 집회를 가졌고, 총회 기단 내내 대형스피커를 통해 총회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삼삼오오 길목마다 지키고 서서 처음에는 반대 팜플렛을 나눠주다가 이를 받아가지 않자 ‘회개하라.’ ‘사탄’ 등등의 욕설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대었다. 처음에는 필자도 외국에 온 손님들에게 이렇게 무례히 할 수 있나 하여 따지기도 하였지만, 막무가내인 저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반대 집회에 30억원의 돈이 뿌려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룹별로 모이는 아침 성서공부 시간에 한 흑인 목사가 조금 전에 겪었던 이야기를 울먹거리며 전해주었다. 자신을 향해 ‘Satan!' 이라고 하는 소리를 듣자 그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고 한다.(인종차별을 겪어온 흑인들의 입장에서 이 소리는 단순한 비난이 아니다.) 그는 솟아오르는 감정을 참고 다가가서 ‘왜 그러느냐고? 왜 예수 믿는 당신이 나를 향해 사탄이라고 그런 몹쓸 비난을 하느냐?’며 사랑의 마음으로 대화를 시도했다고 한다. 영어 대화가 힘들었지만, 조금 지나지 않아 이 여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아마도 위에서 누군가가 시켜서 했겠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도 더한 일이 벌어졌다. 폐회예배가 엄숙하면서도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한참 진행이 되었다. 설교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성공회 백인 사제로서 흑백차별운동에 참여했다가 백인극단주의자가 보낸 소포 폭탄으로 말미암아 한쪽 눈과 두 팔을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픈 경험에 기초하여 매우 감동어린 설교를 전했다. 누구에게나 희망이 솟았고, 성령의 감동이 왔다. 이제 모두가 한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는 애찬식을 가질 참이었다. 고요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는데 갑자기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들어보니 한 괴한이 단상으로 뛰어들어 마이크를 낚아채려다 경호원들에 의해 질질 끌려 가고 있었다. 너무나 순간적이라 모두가 어안이 벙벙했다. 후에 단막 이벤트인 줄 알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명백했다. 반대자가 끝내 예배를 방해하기 위해 뛰어든 것이다.
갑자기 그동안 참고 지냈던 창피함과 낭패감이 일시에 몰려들었다. 아!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천명이 넘는 세계교회 대표들이 모여 열흘동안의 총회를 마무리하는 이 거룩하고도 기쁜 예배 시간에 이 무슨 꼴이란 말인가? 남한교회의 수치가 여실히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너무너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이 모든 폭력을 동반한 신앙인들의 반대가 남북분단으로 인한 흑백이념 대결에 그 뿌리가 있기에 분단의 서러움이 몰려왔고, 그리고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내 탓이라는... 내가 그래도 소위 교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기에... 내 탓이라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그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의자에 앉아 숨을 죽여 통곡을 하다 결국 바닥에 쓰러져 숨을 죽어가며 통곡을 하였다. 여러 사람이 와서 나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예배는 소동으로 인해 잠시 중단이 되어 있었고,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내게 있었다. 이겨나야 했다. 끝을 잘 맺어야만 했다. 나는 주위 사람들을 향해 미안하다고 크게 세 번 큰 절을 했다. 정말 용서해 달라고... 나를 보고 저 사람을 용서해 달라고... 여러 사람이 나를 포옹해주며 말했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나 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그건 교회 지도자인 내가 잘못 처신하고 잘못 가르쳐온 내 잘못입니다.
[나가면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부산 총회는 끝났다. 아니 세계교회 입장에서 본다면 남한교회의 분열상은 단지 세계교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 중 하나에 불과했다. 사실 저들은 이보다 더한 일도 겪어온 것이다. 지금도 종교간 박해는 계속되고 있다. 반대파들에 의해 모스크와 교회가 불타고 있으며 서로 다른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테러와 살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교회는 WCC 총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일어서야 한다. <생명의 하느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이번 총회의 주제가 그러했고,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는 ‘서로의 죄(빚)를 용서(탕감)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