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2013년 12월 19일 한국기독교회관 앞
(감신대, 성공회대, 장신대, 총신대, 한신대.5개 신학대학 신학생 시국기도회)
이 성전을 허물어라
(요한 2:13-21)
[종교와 정치는 별개인가?]
정교분리라는 말이 있다. 종교와 정치는 분명 다르다. 교회나 절에서 하는 설법이나 설교와 청와대와 국회에서의 회의는 그 틀도 다르고 내용도 다르다. 그러나 그 지향하는 목적은 같다. 그건 인간 해방과 구원이다. 정치는 현실적 삶의 구조를 개선함으로 인간 해방과 구원을 지향하고 종교는 인간 자체 혹은 인간 관계의 구조를 개선함으로 인간 해방과 구원을 지향한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는 겉으로는 분리할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분리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헌법에 적시된 민주주의는 정당의 정치인만 추구하는 이념이 아니다. 당연히 한명의 시민으로서의 종교인 또한 여기에 참여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더구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이를 분명한 언어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모든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표인 하느님 나라는 하늘 위에 존재하는 가상의 나라가 아니다, 이 땅 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켜야 땅의 나라이다. 정치는 눈앞에 보이는 물가지수나 국민소득을 통한 해방과 구원을 추구하지만, 종교는 정의 평화 생명이라는 보다 높은 가치에 기초한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고 있다.
종교나 정치는 나름대로의 법을 정하고 잘못된 것들을 스스로 고쳐나가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집단에는 권력이 형성되어 있기에 하위층이 잘못하면 상위층이 이를 교정할 수 있지만, 상위층이 잘못하면 이를 고쳐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총회 자체가 잘못을 저지르면 이를 고치기가 힘들고, 대통령이 잘못을 행하면 이를 고치기가 힘든 것이다. 그래서 종교와 정치는 모든 것이 정상일 불관여가 원칙이지만, 자정 능력을 상실한 경우에는 관여가 원칙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부패가 상대방의 부패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분명히 작년 대선에 부정이 발견되었다. 그것도 작은 부정이 아니라 엄청난 부정이 발견이 되었다. 220만건이상의 댓글공작이 있었다. 그런데 이를 밝히려는 검찰총장이나 수사과장들을 잘라내고 있다. 여기에 개표 조작도 있다. 그런데 대선백서를 통해 이를 고발한 저자들을 소환만 했지, 기소를 않고 있다. 재판을 통해 부정이 드러날까봐, 그냥 두고 개인 비리를 찾아내서 이들의 입을 막으려 하고 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공작이 진행 중이다.
그래 청와대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 하에 이석기의원의 국가내란음모조작사건을 터뜨렸다. ‘절두산 성지’를 ‘결전성지’로, ‘구체적 준비’를 ‘전쟁 준비’로, ‘선전 수행’을 ‘성전 수행’으로, ‘사상누각’을 ‘사상전’으로, ‘전쟁반대투쟁을 호소하고’를 ‘전쟁에 관한 주제를 호소하고’ 등등 272군데가 넘는 발언을 뒤틀어 발표하여 사회를 온통 뒤집어놓고 그리고는 법원에 낼 때는 이를 다 수정해서 제출했다. 이건 공문서 허위작성죄에 국민우롱죄, 거기에 국론을 분열시킨 내란죄다. 공문서 허위작성과 국민을 우롱하고 국가내란을 획책한 국정원은 이번 기회에 해체하고 새로 만들어야 한다. 뿌리를 뽑지 않는 부분 개혁으로는 안 된다. 그리고는 이를 트집삼아 진보당 해산까지 박근혜정부가 주도하고 나섰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독재권력이 무엇입니까? 인면수심(人面獸心)이다. 사람의 얼굴이지만, 하는 짓은 짐승이다. 이승만독재시대가 그러했고, 박정희유신시대가 그러했고, 전두환군부독재시대가 그러했다. 정치권력의 부패와 불의 앞에서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독재권력이 주는 떡고물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민중의 혁명만이 독재권력을 바로 잡을 수 있었다. 419민주의거, 부마민중항쟁, 광주민중항쟁 그리고 87년 6월민중항쟁을 통해 잘못된 국가권력을 바로 잡았다. 이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의 역사이다. 그리고 이러한 민주화의 역사의 전면에는 언제나 예언자의 사명을 깨달은 소수의 종교인들이 있었다.
가장 먼저 쓰인 마가복음서를 보면 예수가 언제 세상에 나오시는가 하면, 30세 생일을 기점으로 나오신게 아니라, 요한이 잡힌 뒤에 오셨다. ‘요한이 잡힌 뒤에’라는 말은 요한이 국가폭력에 의해 하늘의 임무를 더 이상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요한의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이다. 그것도 예루살렘이나 광야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갈릴리에 오셨다는 말은 억압당하는 민중 속으로 오셨다는 말이다.
그러면 요한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는 왜 감옥에 갇혔는가?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이다. 무슨 소리인가? 광야는 히브리말로 므드바르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곳이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대변하는 예언자란 말이다. 어떤 예언자인가?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꿀을 먹는 예언자 곧 엘리야의 정신을 타고난 예언자이다. 엘리야는 누구인가? 그는 850명의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의 비호를 받고 있던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선지자들과 홀로 대결하여 이긴 전설적인 예언자이다. 그의 예언자성은 부당한 독재 국가권력에 정면으로 대결함에 있다.
이 엘리야의 정신을 타고난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다. 그래서 그는 헤롯왕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이로 인해 옥에 갇혔다. 그가 옥에 갇히자 그가 못다 한 일을 완성시키기 위해 예수께서 인간 역사 안으로 개입하신 것이다. 곧 예수님의 구원 사역의 시작과 핵심은 예언자의 사명이다. 그는 당시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신다. 헤롯을 교활한 여유에 비유하고 지도자들을 위선자라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호된 욕을 하신다.
그럴뿐더러 저들의 모든 권력의 최고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을 들어가 채찍을 휘둘러 잘못을 저지르는 자들을 내어 쫓고, 심지어는 이를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 선언하신다. 여기서 허물라고 하는 것은 저들이 46년동안 돌로 지어 올린 돌성전이 아니라, 야훼 하느님을 지성소에 가두어놓고 자기들 마음대로 만들어놓은 민중의 삶을 옥죄이는 율법 체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 법은 오늘날로 말하면 북의 형제를 원수로 여겨서 증오심을 부추기는 국가보안법이다. 천안함 침몰이 분명 조작임에도 입을 다물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종북 빨갱이로 몰리는 이 불의한 체제가 곧 국가안보라는 무소불위의 오늘의 율법 체제이다. 인간의 이성을 말살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저항함으로 존재 가치를 갖는 사람을 돼지로 전락시키는 법이 곧 율법이요 오늘의 국가보안법이다.
예수는 당시 율법이 더러운 곳으로 곧 마귀의 땅으로 규정한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만나서도 대화를 해서도 안 되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고 그를 하느님의 딸로 변화시키시고 그리고 그를 통해 그 땅의 복음으로 변화시키셨다. 굳이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을 찾지 않아도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신령과 진리로 예배드리면 바로 그곳이 성전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허무시고자 하신 예루살렘 성전은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외면하고 저들을 성전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여 아멘 아멘 믿습니다 하여 물량적 성치를 신앙의 성공으로 말하는 곧 아편주사를 놓아 환상을 갖도록 하는 곧 세상 가치에 함몰된 성전을 허물라고 한 것이다.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은 과연 무엇인가? 나 개인을 넘어선 교회 공동체를 만드신 그 뜻은 무엇인가? 왜 세상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지를 물어야 한다.
죄송한 이야기이지만, 이제 여러분이 담당하여 할 남한교회는 이미 그 수명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좇지 않는 교회가 어찌 교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이름을 팔아먹고 사는 기업에 불과합니다. 세계 50대 교회 중 절반이 남한 땅에 있다고 하는게 자랑이 되어서도 안 되지만, 지금 그 자랑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50년 백년? 지금 교회에 가보시면 평균 나이 60세가 훨씬 넘습니다. 남한교회의 절반이 훨씬 넘는 농촌교회에서 60세 할머니는 청년회 소속입니다. 그것도 손가락을 셀수 있을만큼 소수입니다. 20년 전부터 개신교인 숫자는 감소하기 시작했고, 현재 가속도가 붙어 진행 중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유럽교회마냥 노인들 몇 명만 큰 예배당에 모여 앉아 예배드리는 모습들을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들의 신앙의 열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적 흐름에 따라 다른 방향에서 신앙 요구가 있습니다. 다만 성서신학 조직신학 실천신학 등등의 옛 구조의 틀 안에서 움직여가는 현재의 신학교육이 이를 따라가지 못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은 이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지금도 그러하거니와 나이 들어서도 여러분은 안녕하지 못할 것입니다. 남한교회와 사회의 미래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고, 역사는 항상 깨어 있는 소수자가 만들어 왔습니다. 잘라진 나무 둥지인 이새의 뿌리에서 역사 변혁의 선구자들이 나오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러한 사람들입니다. 남보다 앞서 가는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외로울뿐더러 길을 새로 내야 하니 힘들고 때로는 돌을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을 내는 창조의 기쁨이 있습니다. 남이 가보지 않는 길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저는 5개 신학대학 목사를 하겠다는 학생들이 함께 하나로 뭉쳤다는 것만으로도 후세의 역사가들은 100점을 줄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이 정치의 불의함을 보고 일어섰다는 점에서 가산점 100점을 더 줄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모두 하늘나라 성적표에 A+를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제목은 이명박 구속과 박근혜 퇴진이지만 여기서 그치지 마세요. 우리의 목표는 이 땅 위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있습니다. 잘못된 정권을 퇴출시킬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정권들이 바로 갈 수 있도록 깨우치고 채찍질을 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교회를 크게 세우는 일에 있는 것도 아니고, 신학박사학위 받는 일에도 있지 않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결단에 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들고 온 바구니에 교회 신축 사진을 넣어갈 것입니까? 아니면 박사학위증을 넣어갈 것입니까?
여러분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였나요? 그건 로마가 반역을 꾀하는 노예나 반란군들을 처형하는 극형이었습니다. 그냥 사형시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킴으로 다시금 로마의 지배에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는 정치법으로 살해된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예수가 국가권력이나 로마의 지배에 적대적이었다는 인상을 지워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정보부나 안기부의 박해를 피해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십여년 전 월터윙크교수로부터 원수사랑 세 가지의 이야기는 다름 아닌 로마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민중의 방식임을 깨닫고 크게 기뻐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치의 비판적 참여가 곧 예수께서 추구했던 종교적 해방의 길입니다. 이것이 민중 속에 부활하는 예수의 몸 곧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본래 독수리의 새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협잡꾼들이 그 알을 독수리둥지에서 암탉의 둥지로 옮겨놓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따라 꿀꿀거리며 땅만 바라다보며 걸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곤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을 바라보며 나는 언제나 저렇게 하늘을 날아보나 하며 자신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신학생이 뭡니까? 하늘을 나는 부활 예수, 독수리의 새끼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날개를 그냥 펴고 상하로 저으면 날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예수 이름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날아보세요. 세상 그 무엇도 하잖게 보입니다.
여러분의 앞길에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이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를 갈릴리 청년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