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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text_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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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83
안병무선생 이장예배(2004. 6. 18) 광주 마석공원
여기에 계신 선배 목사님들은 모두 생전의 안병무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저보다는 훨씬 더 깊은 만남의 관계를 가지신 분들입니다. 학문적인 교류, 교회활동, 민주화와 통일 운동, 그리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모색하는 일에 있어서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과 삶을 나누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만 향린교회 담임목사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오늘 안병무선생님 이장예배의 집례자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위로하는 것은 제 50 인생에서 가장 깊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저 또한 스스럼없이 안병무선생님이라고 고백한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여러분과는 달리 전 안병무선생님 장례식에 직접 몸으로 참석하지는 못했고, 대신 워싱톤에서 제자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장이라고 하는 오늘의 예식을 안병무선생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지, 아니면 뭐 이런 일로 아까운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느냐?고 꾸지람을 하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다시 한번 선생님의 신학적 성찰과 그 실존적인 결단의 행위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이를 우리 각자의 주어진 삶 안에 각인시켜 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바울이 고백한 주의 부활의 능력을 안병무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잠시 들어보고자 합니다.
“시편의 탄식시에서 우리는 민중들의 절규를 듣는다. 그러나 시편의 절규는 절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감사나 찬양으로 변한다. 그것은 그들의 상황이 전능하신 신의 손에 의해 변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절망할 수 없는 까닭은 절규하는 한 절규하는 대상이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아니 절규하는 것은 벌써 그들이 신 앞에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희망에서 현재의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 땅을 사는 우리도 절규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절규는 기도로, 애원으로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단계에 가서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전능의 신을 전제로 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우리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느냐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은 수난자와 더불어 수난하고 있다.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이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에게 체념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것에서 그칠 수 없다. 정말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절규에서 바로 그의 슬픔과 절규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물론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 찬가의 결론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그를 높이 올리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더불어 가난한 자 슬피 우는 자 애통하는 자 굶주리고 목마른 자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된다.(성서적 실존 333-334쪽)
너를 위해 나를 내 던질 수 있는 것만큼 산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여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해방을 위한다면서 저들을 인간불신의 절망의 병에서 해방하는 복음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참여는 대부분 절망적 기조 위에 선 불신과 비판에 그치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부정에 앞선 철저한 긍정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긍정이 있어서 그것을 가로막는 악한 힘과 대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참 사람의 출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참사람은 믿음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됐다.
십자가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 기존세계의 절망을 집약한 사건이다. 이 절망적 상황에서 부활사건이 일어나났다. 그리스도교의 탄생이 바로 이 부활의 아침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복음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암담한 현실이라고 해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희망을 말로 몸으로 알리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다.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 부활사건이라면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일에 그 어느 때 보다도 힘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외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이나 하갈과 같은 입장에서 꼼짝 못한 채 주저앉은 이들에게 대신 양을 보여주고 샘물을 보여주는 일이다.(위의 책 마지막 문단)
오늘 자신의 뼈를 옮기는 일에 증인이 되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뼈의 증인이 되는 자들은 내 부활의 몸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주님과 더불어 갈릴리에 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속히 갈릴리로 오십시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설입니다. 여러분의 예루살렘을 갈릴리의 현장으로 만드십시오.
이제 선생님은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이며 여러분을 통해 선생님의 말씀과 삶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곳에는 선생님에게 구체적인 현장으로서의 하느님의 세계를 보여준 전태일열사가 있고 누구보다도 서로가 의지했던 문익환목사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기에 계신 선배 목사님들은 모두 생전의 안병무선생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저보다는 훨씬 더 깊은 만남의 관계를 가지신 분들입니다. 학문적인 교류, 교회활동, 민주화와 통일 운동, 그리고 새로운 신앙운동을 모색하는 일에 있어서 저보다는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과 삶을 나누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만 향린교회 담임목사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오늘 안병무선생님 이장예배의 집례자가 되었습니다. 스스로 위로하는 것은 제 50 인생에서 가장 깊은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저 또한 스스럼없이 안병무선생님이라고 고백한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여러분과는 달리 전 안병무선생님 장례식에 직접 몸으로 참석하지는 못했고, 대신 워싱톤에서 제자들이 모여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장이라고 하는 오늘의 예식을 안병무선생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일지, 아니면 뭐 이런 일로 아까운 시간들을 허비하고 있느냐?고 꾸지람을 하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은 다시 한번 선생님의 신학적 성찰과 그 실존적인 결단의 행위들을 다시 한번 되새겨보고 이를 우리 각자의 주어진 삶 안에 각인시켜 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바울이 고백한 주의 부활의 능력을 안병무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잠시 들어보고자 합니다.
“시편의 탄식시에서 우리는 민중들의 절규를 듣는다. 그러나 시편의 절규는 절규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감사나 찬양으로 변한다. 그것은 그들의 상황이 전능하신 신의 손에 의해 변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절망할 수 없는 까닭은 절규하는 한 절규하는 대상이 있다는 신앙 때문이다. 아니 절규하는 것은 벌써 그들이 신 앞에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다. 그들은 궁극적인 희망에서 현재의 고난을 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 땅을 사는 우리도 절규할 수밖에 없으며 우리의 절규는 기도로, 애원으로 계속된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단계에 가서 실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전능의 신을 전제로 할 때 빠지기 쉬운 함정이다. 우리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느냐에 대한 확신이다. 하나님은 수난자와 더불어 수난하고 있다. 이것이 성서의 하나님이다. 그가 우리와 함께 하는 한 우리에게 체념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것에서 그칠 수 없다. 정말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는가?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슬픔과 절규에서 바로 그의 슬픔과 절규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은 물론 전부가 아니다. 그리스도 찬가의 결론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한 그를 높이 올리셨다고 한다. 우리는 이와 더불어 가난한 자 슬피 우는 자 애통하는 자 굶주리고 목마른 자를 향한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잊어서는 안 된다.(성서적 실존 333-334쪽)
너를 위해 나를 내 던질 수 있는 것만큼 산 증거는 없다. 그러나 여기 문제가 있다. 그것은 가난한 자 눌린 자의 해방을 위한다면서 저들을 인간불신의 절망의 병에서 해방하는 복음에 소홀하다는 것이다. 오늘의 사회참여는 대부분 절망적 기조 위에 선 불신과 비판에 그치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부정에 앞선 철저한 긍정이 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이같은 긍정이 있어서 그것을 가로막는 악한 힘과 대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참 사람의 출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는 복음의 핵심이다. 이 참사람은 믿음 때문에 십자가에 처형됐다.
십자가는 새로운 일이 아니라 기존세계의 절망을 집약한 사건이다. 이 절망적 상황에서 부활사건이 일어나났다. 그리스도교의 탄생이 바로 이 부활의 아침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바로 복음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암담한 현실이라고 해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희망을 말로 몸으로 알리는 것이 그 본연의 임무다.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 부활사건이라면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러한 사실에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일에 그 어느 때 보다도 힘을 기울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외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이나 하갈과 같은 입장에서 꼼짝 못한 채 주저앉은 이들에게 대신 양을 보여주고 샘물을 보여주는 일이다.(위의 책 마지막 문단)
오늘 자신의 뼈를 옮기는 일에 증인이 되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말씀하십니다. 나의 뼈의 증인이 되는 자들은 내 부활의 몸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미 주님과 더불어 갈릴리에 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속히 갈릴리로 오십시오. 그것은 예루살렘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새로운 예루살렘의 건설입니다. 여러분의 예루살렘을 갈릴리의 현장으로 만드십시오.
이제 선생님은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선생님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있기 때문이며 여러분을 통해 선생님의 말씀과 삶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이곳에는 선생님에게 구체적인 현장으로서의 하느님의 세계를 보여준 전태일열사가 있고 누구보다도 서로가 의지했던 문익환목사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에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 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