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이 시작되었다. 해마다 사순절이 돌아오면, 사람들은 자의든 타의에 의해서든 예수의 고난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고난 이야기는 현실에서 탄압과 억압이 현저하게 존재하는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의 힘이 되었다.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나의 고난과 동일시하면서 인내하는데 용기와 힘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에 있어서 예수의 고난은 단지 교회력 중에서 사순절에 언급되어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회상하거나 추억하면서 감정을 북돋우는 이야기가 되었다. 왜일까?
아마도 그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더 이상 우리 앞에는 고난이 없고, 순교할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예수의 고난은 이제 관념화되어 우리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 우리의 현실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애써 그 고난의 현장을 멀리하거나 적극적으로 찾지 않은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언제나 필연적인 고난의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단지 우리가 그 고난을 외면하고 회피하기 때문에 당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의 고난은 거대한 로마제국의 억압적인 “평화주의”에 신음하는 민중들의 아픔이고, 예수의 죽음은 평화를 위한 평화의 파괴를 반대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 예수의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소유하려고 한다. 본 회퍼는 이러한 십자가 이해를 값싼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우리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사회가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그 일을 위한 고난은 우리에게 필연적이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외면할 수 없는 사명이다. 고난은 회피하면 더 큰 억압으로 다시 다가온다. “고난은 당해야 지나간다. 세상이 홀로 고난을 당함으로 그 것에 망하거나 그리스도와 함께 당함으로 그것을 극복하는 둘 중 하나를 세상은 택해야 한다. 세상을 대신해서 그리스도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오직 그의 고난이 대속의 고난이다. 그러나 계속 세상의 고난을 질 교회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교회는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세상의 고난을 지고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것을 극복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대신하여 하느님 앞에 서야 한다.” <본회퍼, ꡔ나를 따르라ꡕ “제자의 길과 십자가”>
그러면 우리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모든 생명이 하느님의 다스림 속에서 평화를 누리는 사회 변혁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교회의 개혁을 하고 있다. 사회변혁이든 교회개혁이든 많은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과정이 고난이고, 그 길이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짊어지고 가도록 준비된 십자가이다. 이 모두는 모든 생명의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교회의 개혁과 사회의 변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희생이라는 것이다. 교회든 사회는 나 자신이 그 구성원이 되기 때문이다. 먼저 나를 죽이지 않고 나를 희생하지 않고는 어떠한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내가 가진 자존심이나 나의 소유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새로운 것도 추진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다. 예수도 ‘잔이 내게서 지나가기를’ 기도했듯이, 우리에게도 지치고 힘들 때가 반드시 있다.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실망하지 말자.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힘들 때, 예수를 원망한다. ‘자기도 이루기 힘든 일을 우리에게 남겨두고 갔다고.’ 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도 원망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가신 예수님은 이제 우리 뒤에서 우리를 추동하며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보며 ‘보이지 않는 격려’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우리’라고 하는 그 속에서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신앙의 선배들과 동료들이 있다. <이병일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