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무
마 5장 9-14절
처음에는 한두 국정원 직원이 개인적으로 댓글을 단 것에 불과하다. 그건 수백 개의 불과하다고 말하던 댓글이 수천개를 넘어 121만개가 된다고 하더니 오늘 아침 한겨레신문은 이는 인력과 시간이 없어 조사가 끝나지 않아 그럴 따름이고 실제는 2,200만개나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국정원과 사이버사령부와 보훈처의 국가기관이 관권 부정선거에 개입하여 언론을 도배질을 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도 충분한 의심의 여지가 있는 대선개표조작도 있습니다. 박창신신부가 밝혔던 것처럼 익산에 모두 82개의 선거구가 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는 74개의 선거구만 나와 있는데, 전체 투표수는 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컴퓨터조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2, 3년 전 제가 기억하기로는 필리핀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이번 대선에 쓰인 컴퓨터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청문회가 열렸는데, 판사가 물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운영함에 있어 조작의 가능성이 있을수 있느냐?고. 답은 있을수 있다였습니다. 그래서 필리핀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프로그램 도입을 중지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지난봄부터 개신교에서 특검을 통해 대선조작을 규명하라는 촛불기도회가 열렸고, 천주교는 15개 교구별로 시국미사를 드렸습니다. 심지어는 그동안 이런 시국미사를 한번도 드리지 않았던 대구교구에서도 이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응했어야 했는데, 박근혜정부가 이를 무시했습니다. 아니 무시한게 아니라, 조사를 하면 자신들의 부정이 드러나고 그러면 선거 다시 하라는 요구가 나올까봐 이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전주교구가 드린 시국미사에서 박근혜정권의 퇴진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박근혜씨는 청와대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하며 “국민의 신뢰를 저하시키고 분열을 야기하는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며 박신부를 겨냥했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재향군인회와 고엽제희생 퇴역 군인들이 전주성당과 명당성당에 깡패집단마냥 모여들어 화형식을 하는 등 행패를 부렸고, 명동성당에 폭파장치까지 했다는 공갈 협박을 하여 예배를 방해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당은 종북몰이를 시작했습니다.
국민의 신뢰를 저하시킨 분열을 야기한 쪽은 청와대의 권력입니다. 박창신신부님의 대선공작 댓글쿠데타에 의한 대통령퇴진 요구가 과연 종교인으로서 금기를 넘어선 정치개입인가? 아니면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자유 시민으로서의 정당한 발언인가? 이는 안중근은 독립투사인가 아니면 테러암살범인가? 31운동은 독립만세사건인가 아니면 반정부빨갱이들의 정부전복사건인가? 이 모든 판단은 내가 어느 편에 서 있느냐에 따라 결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프란시스코 교황께서 행한 미사 강론을 제시합니다. “그들(정치인들)이 통치하니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통치에 대해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더 잘 통치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능력껏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회교리에 따르면 정치란 가장 높은 형태의 자선입니다. 정치가 공공의 선에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손을 씻고 뒤로 물러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우리는 뭔가 기여해야 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써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무엇일까요?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의 말씀대로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십시오.”
기도는 두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은 골방에 앉아 기도하는 일이고 두 번째는 거리에서 행하는 실천 기도입니다. 거리기도의 효시는 제1성서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은 왕을 향해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의를 행한 장본인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권력자들의 눈에 가시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히틀러 나치의 오른팔 역할을 했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큰 거짓말을 계속 반복하면 사람들은 결국 믿게 된다.” 70년대에는 인혁당간첩사건, 민청련학원간첩단사건, 재일간첩단사건, 재미간첩단사건 재독간첩단사건, 광주항쟁간첩독침사건, 80년대에는 서울물바다북침설에 이은 평화댐건설 사기사건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천안함조작 사건이 있었고 NLL 국경선논쟁이 있습니다. 현재 정권을 비판하는 시민들을 반국가, 종북 매국노로 몰아가는 매카시적 공안방식은 30년대의 일제시대 총독들, 40년대의 히틀러파쇼정권, 그리고 70년대의 박정희독재가 저지른 대중조작 사건의 반복일 따름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종북’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국민의 기본적인 자유와 인권이 크게 저해 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언론들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파악도 없이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종북의 딱지를 씌워 매도하는 경향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습니다. 괴벨스가 한 말처럼 “나에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정말 그대로 신부님의 강론의 앞뒤를 다 잘라낸 다음 한 문장을 비틀어서 북의 연평도 포격을 정당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새누리당의 김진태 의원은 "파리에서 시위한 사람들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 그걸 보고 피가 끓지 않으면 대한민국 국민 아닐 걸요"라면서 대선 부정 의혹을 제기하며 시위를 한 이들에게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곤 이번에는 박창신신부님을 종북몰이하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정권에 반기를 든 사람들을 ‘불령선인’이라하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는‘불순분자, 빨갱이’로 몰아세우더니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 이르러서는 ‘종북(주의자)’로 다시 포장을 바꾸고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와 이념적 지향이 다르다고 대뜸 "어느 나라 국민이냐? 조국은 어디냐?"고 국민들을 협박하는 권력은 자유민주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은 정치적 견해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브라질의 유명한 돔헬더 까마라 주교의“가난한 사람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말하며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자 나를 성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내가 가난의 원인을 따지며 가난을 만드는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고 하자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번 경우에 비추어보면 박창신신부님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연평도에서 죽은 사람들을 위해 헌금을 모으고 추모 미사를 드리자고 하면 사람들은 나를 참 사제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그들은 나를 종북 빨갱이라고 몰아세운다.”
분명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사건에서 죽은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생명은 소중합니다. 그래서 국민성금을 모았고 세금으로 유족들을 돕는데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서해교전과 연평도 사건의 원인인 NLL 문제를 해결하자고, 더 이상의 희생자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무현대통령이 제안한 것처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나 서해공동어로를 제안한 것처럼 평화적 해결을 하자는 의견이 왜 종북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남한의 정책은 무조건 전쟁하자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나라는 나의 조국이 될 수가 없습니다.
독일 통일 후 첫 독일 대통령이 된 로만 헤어초크는 선거를 앞둔 힌 TV 토크쇼에서 “독일을 사랑하십니까?”라는 진행자의 질문을 받고 “나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결혼 제도를 사랑하지는 않는다”라고 답했습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이 애국심도 없다면서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법률가 출신인 헤어초크가 보기에 독일이라는 국가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결혼과 같은 제도일 뿐이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결혼제도가 아니라 아내였고 정치인으로서 사랑하는 대상은 독일이라는 국가가 아니라 국민들이었던 것입니다. 맹목적인 애국주의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나치 독일과 일본 군국주의와 미국의 매카시즘이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미국의 진보학자 하워드 진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조국, 그리고 국민이지 어쩌다 정권을 잡게 된 정부가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시적으로 청와대의 주인이 된 정권이 ‘조국’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조국과 정권은 다른 것입니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로운 회칙이라고 할 수 있는 <복음의 기쁨>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그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교회가 복음화라는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과 어울렸듯이 교회도 스스로 가난해지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황은 ‘안전한 성전 안에서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멍들고, 아프게 하며 더러워진 교회를 더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심화되어가는 경제적 불평등을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예수는 포도원 농부의 비유 말씀에서와 같이 단순히 불평등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이 아닌, 꼴찌가 첫째 되는 전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즘 반신반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박정희의 5미터짜리 대형동상이 서 있는 자리에서 군수가 그를 추모하며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정신 나간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현수막을 예배당 전면에 걸고 박정희 추모예배를 드린 한 교회의 설교 중, 한 원로목사는 “독재해야 돼!”, “하나님도 독재하셨어!”라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습니다.
독재시절, 정보부원이라고 하면 하늘의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 서슬 퍼렇던 시절, 말 한마디 잘못해도 지하 취조실에 쥐도새도 모르게 끌려가서 짐승처럼 두들겨 맞고 고문당하고, 교수는 강단에서 쫓겨나고 학생들은 재적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가정이 파산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 하느님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말씀이 들려져야 할 강단에서 다시 독재를 들먹이는 어처구니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목사는 믿을 사람이 못됩니다. 평신도밖에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뜻을 모아 160명의 이름으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동의하는 평신도성명서를 낸 일은 정말 역사적인 일로 치하하고 싶습니다. 수백차례 이런 촛불 모임에 참석하지만, 이렇게 “이명박구속과 박근혜퇴진”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개최함에 감명이 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다음부터는 평신도 여러분이 설교를 하고 저 같은 목사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저기 앉아 설교에 감동을 받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의로운 일이기에 세상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소금과 빛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향해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 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위에 의한 소금과 빛의 역할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금은 자기 몸을 녹여 부패를 막고, 빛은 자기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힙니다. 여러분을 통해 하느님의 나라가 속히 임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