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신도회 주일 하늘뜻펴기(20140119)

예수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새로워지는 교회

미가 7:9; 요한11:5-7; 8:12

 

1월을 영어로 January라 하는데, 이는 앞과 뒤의 두 얼굴을 갖고 있다는 그리스의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시간의 신 Janus(야누스)에 어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새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가지만, 동시에 지나온 한 해를 좀 더 충실하게 살았더라면... 혹은 좀 더 주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많이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됩니다. 어제를 단지 아쉬움으로 그치지 않고 내일을 향한 성찰과 발돋움의 기회로 삼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위해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오늘 2014년 여신도회 주일의 본문 말씀은 기장 총회가 채택한 말씀이고 제목 또한 총회의 표어입니다. 기장은 교단 역사로는 60년을 맞았지만, 기장 정신은 130년의 한국기독교 전체 역사 속에서 예수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복음을 서구인들의 눈이 아닌 우리 자신의 눈으로 읽고자 하는 주인 정신에 있습니다.

 

오늘의 세 본문 말씀은 모두 을 말합니다. 빛은 밝음의 상징이고 거짓과 불의로 얘기되는 어둠을 몰아내는 힘의 상징입니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라고 선언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빛 가운데 산다는 것은 성도의 사귐을 갖는 것이고 이 사귐은 예수의 피를 통한 새로운 인간 곧 중생의 체험을 통한 변화된 삶에서 시작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사랑의 빛입니다. 요한복음은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신적 선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유일한 분이고 그분 안에 참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생명의 빛입니다. 예언자 미가는 사회적 공의가 땅에 떨어져 곧 나라가 멸망할 것이지만, 그러나 마침내 주께서 이 민족을 구원하는 곧 빛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공의의 빛입니다.

 

이제 본문말씀에 근거한 세 가지의 빛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천해야 할 신앙의 모습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의 빛입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의 자신을 가리켜 죄인의 괴수였다고 고백하며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살아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과 요란한 꽹과리에 불과하고 하늘의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곧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깨닫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면 사람은 누구나 벌거벗고 거울 앞에선 사람처럼 모든 죄가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난 한 주간을 잠시 돌아보아도 무심코 저지르는 행동으로 인해 가족이나 교우나 동료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음을 깨닫습니다. 요한서신의 저자는 이러한 죄책감을 넘어서서 우리의 근본적인 죄를 지적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랑은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산다는 것은 세상적인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신도 회원 여러분! 올 한 해는 특히 사랑에 빚진 자의 심정을 갖고 교우들과 주위의 소외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생명의 빛입니다. 요한복음은 특히 생명이라는 단어를 무척 좋아합니다. 생명이라는 단어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다 합쳐도 5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반해 요한복음에는 무려 17번이나 나옵니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은 단순히 인간의 수명을 말하는 물리적 생명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가장 잘 알려진 예가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입니다.

 

어느 날 예수 일행은 유대에서 북쪽 갈릴리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는데, 당시 율법에 의해 더러운 땅으로 정죄받은 사마리아 땅으로 들어가십니다. 정오에 수가성 우물가에 가셨다가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인을 만납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 하자 대뜸 이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사람과는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더욱이 내가 쓰는 두레박을 쓰시겠다고 하니 이게 법에 어긋나는 일인지 모르시오?’라고 반문합니다. 예수께서는 민중의 삶을 억누르는 율법을 새롭게 해석할뿐더러, 지난 수백 년 동안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에 덧씌워진 동족간의 미움과 원수의 철조망을 걷어내기 위해 들어가셨지만, 이 여인은 이를 몰랐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도리어 너는 내게 생수(생명의 물)를 구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아가던 이 여인은 자신을 진정 내어 맡길 수 있는 참 남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를 알뿐만 아니라 영적 목마름을 채워주시는 분임을 깨닫자 그는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은 그 시대의 화두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저 산(그리심성전)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하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성전)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서로 주장하는데, 누가 옳습니까?’ 이에 예수께서는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답변하십니다. 곧 야훼 하느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시는 온 인류의 창조주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신 야훼는 예루살렘 성전 지성소 안에 거하신다고 하는 당시의 전통적인 유대 민족의 편협한 신앙을 비판하신 혁명적인 발언입니다.

이에 깊은 깨달음을 얻은 이 여인은 너무 기쁜 나머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들어가 자기가 메시야를 만났으니 다들 나오라고 외칩니다. 마을 사람들은 손가락질을 받던 여인이, 자기들과 만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오경에만 물을 길으러 다니던 여인이 갑자기 자기들 앞에 나타나는 변화된 모습을 보자 깜짝 놀라 예수에게 나아와 구주로 영접합니다.

 

여섯 번째 남편과 살아온 이 여인은 실제의 여인이면서 또 영적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상징 인물로 동시에 그려지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의 숫자에도 포함되지 못했던 여성 차별이 극심했던 시절 그는 남성들로부터 계속해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얼굴에 큰 흉터가 있거나 심각한 장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존감이 완전히 깨어져 나간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만나 깨어진 자아를 회복하고 마을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섰습니다. 거듭난 사람의 가장 극적인 예입니다.

 

이 이야기를 바로 앞서 나오는 니고데모와 비교하면 더욱 놀라운 얘기가 됩니다. 그는 유대 남성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대학자이자 권력 기구인 산헤드린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과 비교하면 극과 극입니다.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고 하나님 나라와 거듭남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지만, ‘어떻게 사람이 두 번 어머니 뱃속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는 우문을 던진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는 당시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의 한계를 폭로함고 동시에 남성들의 지배체제를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 여인은 깨우침을 얻어 즉각 예수의 제자가 되어 세상에 그 자신을 드러냅니다. 곧 사마리아 여인은 빛의 딸로, 니고데모는 암흑 속에 머물고 있는 어둠의 아들로 말하고 있습니다. 남성차별 사회 속에서 분명한 여성해방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면 더 놀라운 얘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은 다른 세복음서와 비교하면 매우 독특한 복음서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표적이라 부르고 가나에서의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을 첫 번째 표적, 그리고 두 번째 표적, 세 번째 표적까지 부르다가 횟수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나온 기적(표적)의 횟수를 헤아려 보면 모두 일곱 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의 빛이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나는 ...이다라는 선언 또한 헤아려 보면 일곱 개입니다. 나는 ...이다.’라는 희랍어를 히브리어로 옮기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을 지닌 야훼가 됩니다. 왜 유대인들이 예수에게 그토록 적대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파했다는 말씀은 곧 예수가 바로 자신이 찾던 일곱 번째 남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 제1(구약)성서에서 신부나 여인은 백성으로 그리고 남편은 신으로 종종 비유합니다. 곧 사마리아 여인이 섬겼던 다섯 남편들이란 과거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제국의 신들을 상징합니다. 애굽의 바로왕을 비롯한, 아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의 현재의 남편은 로마제국입니다. 장군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황제가 된 후 그 이름을 아우구스도스라 바꾸는데 이는 바로 신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 얘기는 곧 요한 공동체가 직면했던 로마황제 숭배에 대한 저항이 담겨 있습니다.

 

요한은 오늘 우리 또한 과거의 사마리아 여인처럼 군사적 힘에 기초한 부강한 나라들을 남편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해 부산에서 모인 세계교회협의회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라는 주제 아래 모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을 따라가는 사람들은 정의와 평화의 가치가 실현되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워나가는데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세 번째 생각할 빛은 미가 예언자가 말하는 공의의 빛입니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언자 미가는 불의한 현실을 이렇게 폭로합니다.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고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고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들로 모두들 서로 공모한다.”(2,3) 오늘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요?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라고 말하지만, 사회적 공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작년 국제투명성기구(TI)가 발표하는 부패인식지수(CPI) 순위에서 한국은 45위를 기록했습니다. 한때 39위까지 올라갔던 순위가 과거 정권에서 유행한 부자되세요라는 말이 등장하면서 계속 떨어지고 있습니다. 자살률은 지난 8년동안 제1위입니다. 지난달에 발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국민 47%가 스스로를 하위층이라고 말합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서 스스로를 하위계층이라고 말할까요? 이 수치는 경제인식지수를 넘어서서 자아정체성 정신지수로 이해하고 싶습니다. 요즘 청소년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이 어차피라고 합니다. ‘어차피좋은 대학 못갈 바에는... ‘어차피연속극에 자주 나오는 그런 호화 저택에 살지 못할 바에는...라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이 국민 절반에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더욱 사회적 공의의 잣대가 되는 정치 현실은 어떠한가요? 기장 총회를 비롯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그리고 천주교 불교 지도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국정원과 군대, 보훈처 등의 국가기관이 불법적으로 개입한 전모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 안에 미가 예언자가 고발한 대로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께서는 우리가 곧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짠 맛으로 부패를 막고, 빛은 자기 몸을 태워 사람들이 나아갈 길을 보여줍니다. 기장 정신의 좌표를 세우신 김재준목사께서는 구원의 상징으로 믿는 십자가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철저한 인간혁명, 사회혁명, 종교혁명을 위한 싸움의 표징이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기존질서에 안주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새것을 향하여, 그리고 하느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부단히 전진한다. 그래서 교인도 교회도 불안하다. 전장은 안주터가 아니기 때문이다.”(김희헌, 장공 김재준어록집 188)

 

예수께서 율법을 깨고 사마리아의 여인을 찾아 나섰듯이 교회는 자기 안에 안주하려는 타성을 깨고 세상 안에 가장 낮은 자들을 찾아 나설 때에야 비로소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빛 안에서 나날이 새롭게 거듭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