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계동(武溪洞)

 

   2010년 4월 24일. 토욜. 이야기가 있는 여행은 부암동을 중심으로 일대를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어제까지 비뿌리고 춥던 하늘과 기온이 오늘은 모처럼 화창하고 기온도 따뜻했습니다. 부암동주민센터 마당에 모였다가 10시가 좀 넘어 출발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와인과 맛있는 파스타를 먹을수 있는 '오월'.

  

  부암동 주민센터를 끼고 좁은 길을 조금 오르면 '현진건 집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집이 헐려 없어져 버린 현진건 집터의 언덕 위에 낡은 한옥 한 채가 보입니다. 한옥 밑 바위에 '무계동'이라 새겨져 있습니다. 안평대군의 별서 터가 아닐까요? 안평대군의 집은 얼마전 헐려버린 옥인아파트 자리였으니까요. 무계동이란 무릉도원(武陵桃園)과 같은 계곡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겠죠. 도가(道家)에 취해 도연명(365~427)의 시를 읊고 풍류를 즐기면서 예술의 세계를 이야기하며 살았겠죠. 안평대군 이용 자신이 조선 전기(前期)를 대표하는 서예가였습니다. 이곳에서 무릉도원을 거닐었던 꿈얘기를 화가인 안견에게 해 주었나 봅니다.  그래서 1447년 '몽유도원도(夢遊桃園圖)'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 그림은 일본의 천리대학이 가지고 있습니다.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은 세종의 셋째아들이었습니다. 바로 위 형인 수양대군과 맞서며 조카 단종을 지키려 했습니다. 단종이 임금이 되자 이징옥이 보낸 군사를 주둔시킬 만큼 넓은 땅이었나 봅니다. 1453년 계유정란으로 안평이 꿈꾸던 무릉도원은 풍비박산 났습니다. 안평은 강화도 옆 교동도에서 서른여섯의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인과 아들도 같이 죽고 며느리와 딸은 계유정란의 공신 권람의 노비가 되었다네요. 형제를 죽이는 골육상쟁은 이어졌습니다.

 

  계유정란으로 무계동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주인이 바뀌거나 폐허가 되지않았을까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을겁니다. 나라를 잃고 식민지시대를 살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을 합니다. 손기정의 가슴에 달았던 일본국기를 지운 사진이 동아일보에 실렸습니다. 적어도 오늘의 동아일보는 아니었습니다. 총독부는 동아일보를 휴간시켰고 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사회부장 현진건은 직장을 잃었습니다. 모든 걸 버리려고 무계동에서 몇 년간 살았나 봅니다. 낡고 허물어진 이 집을 이 땅 소유자가 2003년 11월에 헐어버려 빈 터만 남게되었습니다. 현진건의 호가 빙허(憑虛)입니다. '빈 것에 의지한다'는 그의 호처럼 모든 것이 비어버린 빈 땅에서 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평지(平地)에서 바벨탑처럼 높이를 지향(指向)하고 빠른 변화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즈막한 집과 느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 부암동입니다. 바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느림과 휴식을 찾으러 부암동에 옵니다. 그런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부암동도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더 빠른 변함을 바라는 종로구청은 무계동 가까운 5백평 땅에 주차장을 만들겠다 하고 주민은 이를 거부하는 대결이 부암동에서 진행 중입니다.

 

 

석파정(石破亭)

 

  60년 안동김씨 세도정치 시대에 장의동(현재 종로구 청운동)에 살던 김씨들은 자하문 밖에 별서를 지어놓고 삶을 즐겼습니다. 그 중에서도 김흥근(1796~1870)의 볈가 좋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1863년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끝이났고 권력은 흥성대원군 이하응(1820~1898)의 손에 쥐어졌습니다. 이하응은 그 좋다는 김흥근의 별서를 원했습니다. 아들인 임금까지 동원한 끝에 이하응은 이 별서를 차지했습니다. 이 별서의 이름은 이하응의 호를 따 '석파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공개할 날이 언제일까요?

 

  부암동 석화빌라 옥상에서 바라 본 석파정의 모습입니다.

 

 

석파랑

 

  지금은 고급 한식집으로 운영되고 있는 '석파랑'입니다. 서예가이자 정치가였던 손재형(1902~1981)의 주택 컬렉션입니다. 손재형은 1963년부터 7년동안 서울의 좋은 한옥이 헐리면 그 재료들을 사 모아 지금의 홍지동에 한옥 몇 채를 지었습니다. 손재형이 살았던 시대에는 '문서루(文瑞樓)'라는 집이름(堂號)이었지만 그가 죽고 난 뒤 이름까지 바뀌고 말았습니다.

 

   추사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그려 준 '세한도'는 일제 식민시대에 일본인이 소유하게 되었답니다. 해방이 된 뒤 손재형은 그 일본인을 설득하여 세한도를 되찾아왔습니다. 그걸 기념해서 이 집 대문에 걸어두었나 봅니다.

 

 

  석파정 별당입니다. 손재형은 석파정에 있던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별당을 사서 1958년 자기 집터로 옮깁니다. 청(淸)의 건축 양식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석파정의 건물들입니다.

 

  인왕산 자락 석파정 부근에 봄이 왔습니다.

 

 

홍지문(弘智門) 

 

  1711년(숙종37년). 한양 방어를 위한 북한산성을 다시 쌓습니다. 그리고 한양성곽과 북한산성을 연결하는 탕춘대성도 쌓습니다. 이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홍지문이 만들어집니다. 1715년(숙종41년)의 일입니다. 홍지문은 한양도성의 북대문 이름이어야 했죠. 북대문의 이름을 숙청문(후엔 숙정문)이 되는 바람에 도성 밖 홍제천(모래내) 옆의 문 이름이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