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싸움과 믿음의 승리(딤후 4장 7-8절)

2011년 9월 7일 서울대병원


차 뒤에 좋은 글귀를 써서 붙이고 다니는 범퍼스티커라는게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볼 수가 없는데, 미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저도 미국에 있을 때, Jesus Loves Your Smiles 란 글귀가 새겨진 스티카를 붙이고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간혹 재미있는 글귀가 종종 있어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앞 차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읽어보는 것은 하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 전에 보았습니다만, 아직도 잊히지 않는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그건 “당신의 장례식에서 목사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하라.” 였습니다. 미국은 거의 100% 목사가 장례식을 집례하게 되는데, 사실 살인자라 하더라도 마지막 가는 인생길에서 그리고 가족들이 슬퍼하고 있는 자리에서 그는 나쁜 사람이었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할 수 없이 좋은 얘기를 하게 되는데, 실제 그의 삶의 모습이 그러하지 못할 경우에 목사는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어 괴롭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아침에 제 마음은 다른 의미로 괴로운데, 그건 오늘 제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해도 어머님께서 지난 80년의 세월동안 남기신 아름답고 고귀한 삶을 다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선 제가 어머님과 직접 만난 삶의 기간이 너무나 짧은 것도 이유가 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어머님의 삶의 그릇이 너무나 크고 넓고 깊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자격도 없는 사람이 갑작스레 전태일재단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어머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는데, 저의 어머님과 연배가 비슷하신데 저의 어머님은 LA에 계셔 일 년에 한 번도 얼굴 뵙기가 힘들어 제 혼자 마음속으로 한국에 계신 나의 어머님으로 뫼시고 살아가야지 하고 마음을 먹었습니다만,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고 정성을 다해 모시지도 못해 못내 아쉬운 마음뿐입니다.


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 그 코에 입김을 불어넣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죽으면 몸은 흙속에 묻혀 본래의 자리인 땅으로 돌아가고, 우리의 영혼 또한 본래의 자리인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말에도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옳은 표현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어디에 우리의 시선을 두느냐에 따라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는 전연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시선을 흙으로 돌아가는 육신에 두는 사람은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슬퍼할 수밖에 없지만, 반면에 그의 영혼에 두면 그분은 하느님의 품이라는 영원의 세계에 들어가셨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영원을 사모하고 영원한 하느님의 세계를 사모하는 부활의 사람들이기에 이러한 죽음의 자리에서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이 말은 죽음 후의 삶 곧 부활이야 말로 진정으로 깨어있는 삶임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단지 죽어서만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에도 깨어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어머님이나 전태일님은 우리 모두에게 깨어있는 사람으로 진정 본이 되는 분들입니다. 한 가족 중에 한분만이라도 이런 삶의 본을 후세에 남기기도 쉽지 않은데, 아들과 어머님 두 사람을 모두 가진 경우는 참으로 드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유가족들은 슬퍼하기 보다는 이 두 분의 가족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세상의 위대한 삶의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가족들은 오히려 더 많은 아픔을 가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머님이 그러했고, 전태일동지가 그러했듯이 가족보다는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오히려 희생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머니가 필요한 시간에도 어머님은 세상의 옳음을 위해 밖에 나가다니셔야 했고, 때로는 이런 일로 인해 감옥에도 가셔야 했습니다. 이시간 우리 유가족들에게 더욱 크신 하늘의 은총이 이 시간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아마 어머님도 ‘그래 태삼아 순옥아 태리야 미안하구나 매실아 조엘아 삼진아 너희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 하며 이 시간 하늘나라에서 이 자리를 굽어보며 말씀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전태일님의 친구들 ‘영문 진철 승철 현재 종인 기표 수호'에게는 먼저 떠난 태일이 대신 아들 노릇 해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정말 고맙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머님의 삶, 그건 한마디로 이 땅의 가난하고 설움당하는 모든 민중들의 희망이요 빛이었습니다. 그분이 가는 곳마다 움틀되는 생명의 기운이 넘쳐 흘렀고, 굽은 것을 바로 펴는 정의의 힘찬 함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우리 역사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희망을 주고 생명을 준 사람이 또 어디에 있었습니까?


어머님은 전태일님의 못다한 생명을 이어받아 님의 몇 배 몇 십배 몇 백배의 삶의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땅에 묻힐 수도 있었던 그냥 귀퉁이에 실린 신문 기사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님의 고귀한 이웃사랑 생명정신을 되살려내고 이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어머니 누님으로 살아나셨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참 삶인지, 예수를 믿고 부활을 믿고 영생을 믿는 사람이 살아가야 삶의 본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 노동의 중요성, 생명의 소중함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갈릴리에서 만나자.’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셨던 곳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서 마치 80년대의 광주와 같이, 오늘의 강정마을과 같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가장 억압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그 시대의 가장 소외되고 빼앗기고 눌린 삶을 살아가는 오흘로스 민중들과 함께 거하셨고, 저들에게 참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고, 다가오는 새 세상, 하느님의 나라의 주인이 바로 저들임을 깨우치셨습니다.


갈릴리에서 펼치셨던 하느님 나라 운동 그건, 당시의 세상 권력자들을 내려치시어 정의를 바로 세우시는 일이요, 총과 칼로 세상을 지배하려는 자들의 오만을 꺾으시어 평화를 이루시는 일이요, 노예와 떠돌이들이 인간답게 사는 평등과 생명의 나라를 세우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다 이루시지 못하고 33세의 청년의 나이로 로마의 정치범들만을 처형하는 십자가 형틀에 매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못다한 일을 제자들이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죽으셨지만,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님 또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못다한 일들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십니다. 부산 영도에서, 쌍용에서, 포이동 266번지에서, 시청 앞 재능 현장에서, 명동 마리에서 청계천에서, 곳곳의 착취당하는 노동 현장과 철거민들의 아픔 속에 함께 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장례식장은 한 인간의 마지막 종착지가 아닌, 보이는 육신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부활의 기차로 갈아타는 간이역입니다. 오늘 우리는 돌아가신 어머님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을 증언하기 위해서 곧 우리 안에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몸을 증언하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어머님은 이제는 이 땅의 어떠한 것도 병마도 아픔도 고통도 시간도 공간도 제어할 수 없는 하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셨습니다. 복음서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마땅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저 잔다고 얘기했고, 심하게는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 따라오겠다는 사람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일견 참으로 예수님은 인정도 없으신 분이시다. 라고 하실지 몰라도, 예수님에게는 죽음이라는게 없는 분이셨습니다. 이미 영생을 살고 계셨던 것이기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신 것입니다. 어머님 또한 그렇습니다. 특별한 유언을 남기시지는 않으셨지만, 그분의 삶 전체가 어머님이 남기신 유언이십니다.


러스킨이란 사람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날마다 밤이 오고 해마다 겨울이 찾아오는 것과 같이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들은 밤이나 겨울에 대해서는 준비를 하지만 어찌하여 죽음에 대해서는 조금도 준비를 하지 않는 것일까? 죽음에 대한 준비는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훌륭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저는 이 시간 어머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실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유가족 모두가 남은 인생을 값지게 훌륭한 인생을 살아가달라고 하는 부탁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우리 안에 부활의 몸으로 살아계시듯이 어머님 또한 영으로 말씀으로 희망으로 기억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어머님이야 말로 사도 바울이 그러했듯이 선한 싸움, 달려가야 할 길을 다 달리신 분이십니다. 어머님은 지금 생명의 면류관을 머리에 쓰시고 기뻐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들이 어머님의 뒤를 따라 힘차게 기쁘게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시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유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천상병 시인은 귀천이란 시로 저의 하늘 뜻을 마치겠습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