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회(2) 예배

자본과 하느님!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여호수아 24, 14- 18 ; 루가복음 24, 25- 35


 한  문 덕 목사

        오늘은 창조절 첫째주일입니다.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이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 주의 영광 기리는 노래 하늘 높이 퍼집니다.”(시편 8:1)라고 시편 기자가 노래했듯이 하느님이 지으신 거대한 창조세계를 보면 우리는 그 앞에서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광대무변한 우주와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한 개인은 얼마나 작고 약한 존재인지요. 자주 등산을 하지는 못하지만 지리산에만 올라 봐도 그 거대함 앞에서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지고, 겸손해 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걸음 멈추고 문득 푸르게 펼쳐진 저 하늘 한번 올려 보고, 언제나 신실하게 세상을 비추는 해와 달과 별들을 보면서도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입구에서 만난 성 베드로는 이 사람에게 아주 급할 때 펴보라고 쪽지 하나를 건넸습니다. 쪽지를 받은 이 사람은 천국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아무리 찾아도 황금길은 나오지 않고, 천국에 있으리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의구심 가득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지만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아 혹시 천국이 아니라 다른 곳에 온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한 마음이 밀려 오기 시작했는데 마침 큰 바위위에 서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에게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지요?”하고 물었습니다. 질문을 들은 하느님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이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는 난감하기 그지없었고, 그 때 베드로가 준 쪽지가 생각이 났습니다. 쪽지를 펴보니, 그곳에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라는 성서말씀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느님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애초부터 세상에는 너와 나밖에 없었다.”1)


        어쩌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볼 줄 모르는 우리의 비뚤어진 눈과 마음 때문에 내 것 네 것 하며 티격태격 살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이 아닐는지요?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느끼고 그분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 우리를 흔들 수 있을까요? 매 순간 살아계신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고 누렸던 분! 그리고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던 분이 계셨으니 그는 바로 나자렛 청년 예수였습니다. 예수를 따랐던 이들은 예수와의 그 짧은 만남 속에서 무한한 하느님이 유한한 역사 속으로 들어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게 해 준 것은 바로 부활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죽음과 달리 명징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대다수의 평범한 유다인들은 부활 사건을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몰래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마태 28:11-15). 빈 무덤의 첫 목격자들인 여성제자들의 증언을 듣고 대부분의 사도들이 보인 반응은 쓸 데 없는 헛소리라는 것이었습니다(루가 24:11, 마르 16:11, 요한 20:9; 25). 오늘 우리가 읽은 제2성서 본문 바로 앞부분을 보면 베드로조차도 부활신앙에 이르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도들과 달리, 여성제자들의 증언에 벌떡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 빈무덤과 수의를 확인했지만, 그저 이상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갑니다(루가 24:1-12). 눈에 보이는 사실을 중요시 여기는 현대인들에게도 몸의 부활이란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립니다. 이렇게 예수의 부활이란 예나 지금이나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부활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부활사건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했던 사건들이 새롭게 인식되었고, 이후 제자들은 예수의 삶을 증언하는 이들이 됩니다.


        오늘 제2성서의 본문은 예수의 부활현현 사건을 통해 처음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성제자들이 예수의 부활소식을 전했을 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두 사람이 엠마오로 내려가면서 예수에게 일어난 일들, 믿기지 않는 부활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를 예언자 중의 한분으로, 로마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가 대사제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모략으로 로마의 십자가형을 당하자 예수에게 품었던 기대는 사라지고, 침통한 마음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좌절과 절망의 길에 부활한 예수께서 함께 하십니다. 두 사람은 이 분이 예수인지 알아보지 못하는데 예수께서 이들과 대화를 하는 가운데 율법서와 예언서를 비롯한 제1성서의 모든 구절을 설명해 주시고, 함께 식탁에 앉아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이들은 뜨거운 감동과 더불어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게 됩니다. 그 순간 예수께서는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지만, 이제 이들은 엠마오로 가려던 길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 예루살렘으로 가고, 거기에서 열한 사도와 시몬 베드로에게 나타나셨던 예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들이 겪은 것을 증언하게 됩니다(루가 24:13-35).


        이 짧은 부활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두 가지로 간단하게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겪는 좌절과 고통의 순간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재를 느끼는 그 순간에도 예수는 우리와 함께 걸어가고, 우리들의 문제에 동참하고, 그 문제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죽음 이후 첫 그리스도인들은 성서의 말씀을 듣는 것과 성만찬을 함께 나누면서 예수의 현존체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를 알아보게 만든 두 사건, 즉 말씀과 성만찬은 오늘 제가 하는 하늘뜻펴기의 주제인 “예배”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는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행위라고 할 수 있지만(로마 12:1-2), 좁은 의미에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모여 정해진 시간과 공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배하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그렇습니다.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실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서 하느님을 보았다고 믿기 때문에, 하느님께 예배할 때, 하느님에 대해 말할 때, 하느님과 관련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자렛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느님이시다”(마태오 16:15-18)라는 신앙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공동체는 이제 예수께서 부활하신 첫날 즉 안식일 다음 날인 일요일을 ‘주님의 날’이라 부르며 매주 모이기 시작합니다. 모인 이유는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예수를 회상하고 그의 현존을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예수를 기억하는 말씀과 성만찬이 우뚝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매주 모여서(모임) 말씀을 듣고(말씀) 빵을 나누는 가운데(성만찬) 예수의 현존을 느끼고 예수의 증인이 되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보냄) 반복적인 행위를 통해 세상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카리스마적인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배라는 반복적 의례와 교회라는 모임을 통해 2000년 동안 이 세상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일상의 삶에서 지속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하는 모든 공적인 예배의 순서는 하느님을 만나러 들어가고, 하느님을 만나고, 다시 세상을 향하여 나가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최소한의 절차는 바로 예수 부활 이후 모였던 처음 공동체의 모임에서부터 유래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예배도 징울림으로부터 성가대의 찬양까지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그분의 세계로 들어가는 예전에 해당되고, 하늘말씀읽기부터 감사기도까지는 거룩한 하느님과의 만남에 해당되며, 결단찬송부터 파송사를 거쳐 축복기도와 응답송에 이르기까지는 하느님으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에 해당됩니다. ‘모임-말씀과 성만찬을 통한 만남-보냄’이라는 큰 틀이 예배의 씨줄이라면 이 큰 전체구조를 이어주는 ‘기도와 찬송’은 예배의 날줄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전체 구조에 해당하는 각 구성요소들 전부가 예배이기에 각각의 순서들은 유기적으로 잘 배치되고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예배의 틀은 ‘묵도-찬송-기도-찬송-설교-기도-찬송-축도-찬송’의 형태인데, 이 형식은 19세기 미국에서 유행한 천막부흥집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성만찬이 빠진 반쪽짜리이고, 2000년 그리스도교 예배전통의 풍부함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성만찬은 예배의 가장 핵심적인 두 축으로 매주 예배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말씀이나 성만찬이 빠진 예배는 예배라 부르기보다는 기도회나 그저 모임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물론 교회의 규모와 한정된 예배 시간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 개신교 예배에서 성만찬이 드물게 행해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 구성 요소 중 말씀선포만이 강조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한국 개신교의 경우 설교가 중심이 되어 마치 예배는 설교 듣는 시간으로 생각되어지고 나머지 예배의 구성요소는 부차적으로 여겨져 교인들이 설교시간 맞춰 교회오고 설교 끝나면 나가는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설교, 성만찬, 기도, 찬송 각각에 대해서 또 지금 예배 전체를 이루는 각 구성요소에 대해서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합니다만, 하늘뜻펴기에서 그것을 다 다룰 수는 없기에, 매 번 예배를 드릴 때마다  반드시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예배하며 왜 예배합니까?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예배는 예수의 말씀과 삶을 통해 나타나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를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예배는 잘못된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각 종교의 발생과 역사와 문화적 배경에 따라 각각의 종교의례가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의례들을 살펴보면 함께 모여 정해진 일정한 의식을 반복적으로 행한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렇게 하면, 그 형식 자체로 인간에게 소속감, 안정감과 위로를 줍니다. 더구나 모든 종교의례에서 사용하는 음악은 개인이 사회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과 시련에서 오는 상처들을 치유하고 싸매주는 역할도 합니다. 기도와 경전낭송 등은 자신을 성찰하고 각 종교가 말하는 깨달음에 이르게 하여 삶의 문제들을 극복하게 합니다. 무한경쟁 속에서 고향과 공동체를 잃은 파편화된 개인이 양산되는 한 아마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말입니다.


        향린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가 갈수록 비인간적 사회로 변모하고 있고, 거기에 대통령을 비롯하여 정부의 관료와 정치인, 법조계 사람들, 언론권력이 합세하고 있기에 평범한 시민은 고단한 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 사회를 향해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이나 한마디 해 주고 싶은데 향린교회에 오면 예언자의 목소리로 이 사회의 불의에 대해 비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시원하고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겠습니까? 향린교회의 성가대가 하느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찬양과, 예향의 감칠 나는 우리가락의 선율에 맞추어 서로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감동이 밀려오지요. 세상은 사기꾼 천지여서 서로가 서로를 속여 먹으려고 난리들인데, 그나마 교회에 오면 말도 통하고, 대화도 되고 믿을 만한 친구들이 있으니까 위안도 되고 힘도 얻습니다. 이 모든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관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진지하게 다시 한 번 우리들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빈 무덤을 보고도 부활신앙에 이르지 못한 베드로처럼, 온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바울 사도의 지적처럼, 우리 교회의 모든 행위의 바탕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만 신앙 없는 교양인과 교양 없는 신앙인 중 누가 더 나을까요? 저는 교양 없는 신앙인보다는 신앙 없는 교양인이 많아지는 사회가 더 좋은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대로 된 신앙인이라면 교양 없는 짓을 하지는 않겠지요. 저는 향린교회 교인들이 교양 있는 신앙인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모임이 단순히 신앙 없는 교양인들의 모임이라면 여기는 신앙공동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양식과 판단능력이 필요하기에 교양을 갖추는 것은 중요합니다. 상대에 대한 배려와 예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 의사소통방법 등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 놓으려면, 예수처럼 의인뿐만 아니라 죄인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내어 줄 수가 있으려면 우리는 단순히 교양을 넘어 하느님의 초월과 깊이에 직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 예배는 하느님을 만남으로써 바로 바로 이런 경지에까지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 마지막 저녁식사에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시며 예수는 무엇이라 말씀하셨나요?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계약의 피다.”(마르 14:22, 24). 이 짧은 한 두 마디에 예수의 삶이 응축되어 있습니다. 이 말과 함께 예수는 뚜벅뚜벅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십자가의 자리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인간, 그리고 타인을 위해 자신을 거저 내어줄 줄 아는 진짜 인간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참 인간을 통해서 피조물의 구원을 위해 몸소 자신을 내어주시는 진짜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이런 참 하느님, 참 인간에 대한 체험을 통해 주후 381년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이시며,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참 인간이시다”라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먹보요, 술꾼이라는 놀림을 받으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친구하셨던 예수를 통해서 만나는 하느님은 인류를 지배하고 저 하늘 위에서 명령이나 하는, 인간위에 군림하려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상한 갈대에도 마음이 아프고, 꺼져가는 촛불 하나에도 가슴이 저미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강아지똥』의 작가 권정생 선생님은 이라크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들이 속절없이 죽어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보고, 밤이면 맥박 수가 120회까지 뛰고, 열이 40도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안동에 있는 한 허름한 집에서 가난한 한 동화작가가 온 몸으로 아파하는 그 시간, 미국의 증권가인 월 스트리트에서는 전쟁 특수로 군수산업체의 주가가 급등해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고 합니다.2) 여러분이 믿는 하느님은 권정생 선생의 하느님입니까? 월가의 하느님입니까? 어떤 하느님이 참 하느님입니까?


        오늘 하늘뜻펴기의 제목인 “자본과 하느님!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는 정의평화를 위한 기독인연대가 주최하는 제9기 평신도 아카데미의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제목은 오늘 제1성서의 본문인 여호수아 24장에서 따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섬길 자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제 야훼를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기시오.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도 섬겼고, 에집트에서도 섬겼던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여러분들의 조상들이 섬기던 신을 택하든지, 여러분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인의 신을 택하든지 결정하시오.”


        여호수아가 오늘 되살아온다면 우리들에게 뭐라 말했을까요? 분명히 너희는 자본의 신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라고 할 것입니다. 돈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최소한 신약성서에서는 단 한 번도 돈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지 않습니다. 부자 청년에게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 주라고 하고(마르 10:21),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라고 하고(딤전 6;10), 하느님과 맘몬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마태 6:24) 합니다. 이 외에도 많은 예가 있습니다만 왜 성서는 돈에 대해 이렇게 부정적으로 말할까요? 경제학에서는 돈을 가장 유용한 가치의 교환수단이라고 간단하게 정의합니다만 오늘날의 돈은 단순히 거기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돈! 돈은 힘인 동시에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하느님입니다. 돈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며, 돈은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는 징표일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까지도 가늠하는 수단이 되었고,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돈은 자유의 다른 이름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렸지만 돈은 평등을 실현시키기도 합니다. 누구나 300만원만 있으면, 연예인이든, 평범한 시민이든, 배운 사람이든 못 배운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어린이든 어른이든 하룻밤의 호화 유람선의 파티를 즐길 수 있습니다. 돈은 이렇게 강력합니다. 그래서 교회에까지 마수를 뻗치고 돈이 있는 교회가 축복받은 교회요, 하느님이 함께 하는 교회라고 할 정도입니다.


        위에서 본 대로 성서가 주목하는 돈의 특징은 하느님의 권세와 맞먹은 권세를 가지고 있고, 돈은 매매행위를 통해서 모든 인간과 인간관계를 규정합니다. 즉 돈의 권세 아래 있는 경우 인간은 어느새 인간이 아닌 상품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돈에 넘어간 유다가 예수를 상품으로 팔았던 것을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왜 성전에서 매매행위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화를 냈는지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이 상품이 되는 것을 그리스도교는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둘째, 돈은 인간 내면에 있는 소유욕을 표출하는 통로이자, 수단이 됩니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마태 6;21) 예수께서 말씀하셨지만 돈이 가진 권력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더 이상 하느님께 마음을 두지 않게 됩니다. 


        향린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의 말처럼 야훼 하느님을 택할 것인지 자본을 택할 것인지 우리가 섬길 자를 결정해야 합니다. 향린교회마저도 가끔은 돈이 없어 선교를 못한다는 말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정말 돈이 없어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는 걸까요? 어쩌면 우리는 평생을 돈과 하느님을 양다리에 걸치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살게 될 지도 모릅니다. 지나가는 새가 하늘에서 똥을 쌌는데 지나가다가 우연히 거기에 맞을 수는 있겠지요. 우리가 실족하고 실수하여 한순간, 또는 한 때, 돈의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새가 우리 머리 위에 둥지를 틀게 해서는 안 되듯이 탐욕과 죄가 우리의 삶 한 가운데 또아리를 틀게 해서는 안 됩니다. 빵 없이 살 수 없지만, 빵만으로 살려 한 것은 아닌지, 하느님을 섬긴다지만 돈의 노예가 되어있지는 않았는지, 하느님을 믿는다지만 내 고집과 내 알량한 지식과 경험을 더 신뢰하지는 않았는지 정말 깊게 살펴볼 일입니다.


        평소에 심장이 약해서 매우 조심하라는 의사의 주의를 받은 한 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친척의 유산을 물려받게 되어 갑자기 억만장자가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가족들은 이 소식이 톰의 심장병을 도지게 할까봐 그 사실을 당사자에게는 알리지 못하게 하고, 마을 본당 주임 사제에게 부탁을 하였습니다. 조심스럽게 살짝 목회적 배려를 통해 톰이 놀라지 않으면서 이 소식을 받아들이게 말이죠. 그래서 이 주임 신부님은 톰을 불러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보게 톰, 혹시 하느님이 자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십억 달러나 되는 돈을 보내 주신다 하세. 자네라면 그 돈으로 무얼 하겠나?” 톰이 대답했습니다. “반은 성당을 위해서 신부님께 드리지요.” 이 말을 듣자마자 주임신부님이 심장마비를 일으켰습니다.3)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섬기지 않고 진정 하느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봅시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사회생활로부터 도피하는 은신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자가 되어 돈의 권세를 장악하는 것도 아닙니다. 돈의 권세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매매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면서도 거저주시는 하느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거저 주는 삶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돈과 자기를 사랑하는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돈을 위한 노동보다는 돈이 되지는 않지만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은혜에 동참하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상의 방법, 즉 교양인은 어떻게 하면 경제체제를 고쳐서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에게 좀 더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시작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방법, 즉 신앙인은 어떻게 하면 가난하게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를 것이며,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의 대열에 직접 참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에 오염된 마음과 몸을 하느님께 드립시다. 세상으로부터 배운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하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자신의 몸과 피를 흘리기까지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분을 다시 떠올려 봅시다. 이제 마지막으로 여호수아의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야훼를 경외하며 일편단심으로 그를 섬기시오. 여러분의 조상들이 조선시대에도 섬겼고, 특히 신자유주의 시대에 더욱 섬기는 다른 신들을 버리고 야훼를 섬기시오. 만일 야훼를 섬기고 싶지 않거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여러분이 오늘 택하시오. 나와 내 집은 야훼를 섬기겠소.”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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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권수영, <거울부모>, 244-245. 
2) 기독교사상, 2010. 10월호, 135-136에서 재인용. 
3) 앤소니 드 멜로, <종교박람회>, 15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