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 회(1)

예수와 교회

창세기 9, 8- 17 ; 사도행전 1, 6- 11


 한  문 덕 목사

        오늘 우리는 예배를 마치고 4대강 사업을 저지하고 생명의 강을 살리기 위한 거리기도회를 합니다. 2009년에 이어 2010년에도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교회”라는 표어를 선택한 향린교회가 인간의 탐욕으로 마구 파헤쳐지는 4대강 막개발 사업을 막고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의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올 여름 우리가 겪는 무더위에서 간접적으로 느끼시겠지만 많은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들은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생태계의 위험신호들을 감지하고 인류에게 생태적 회심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오래도록 묵시종말론적 사고 속에서 우주의 파멸과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말해왔지만, 오늘날의 기후와 환경의 변화를 보면 지구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합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가운데서 누군가는 죽음을 맞기 전에 지구의 파멸을 경험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확하게 알아야 할 사실은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여 우리의 생명조차 위태롭게 만든 이들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미 오래전에 인간은 자신들의 죄가 어떻게 세상의 파멸을 가져왔는지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에 나오는 홍수 이야기입니다.

        오늘 제1성서 본문이 속해 있는 홍수와 노아의 방주이야기는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를 당해왔던 인류의 보편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창세기를 기록한 이들은 놀랍게도 자연재해 또한 인간의 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반복되는 실수로 죽음과 파멸의 길을 걷지 않고 구원의 길로 가도록 손짓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성서는 이 자연세계가 하느님에 의해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듭거듭 “정말 좋다”라고 말하시는 장면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인간에게 잘 보존하도록 맡깁니다(창세기 1장).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적 자유를 창조세계를 사랑으로 돌보는데 쓰지 않고 오히려 세상위에 군림하고 다른 생명체들을 지배하려 했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이 만드신 선한 창조세계가 파괴되고 생명을 유린하는 일들이 갈수록 더해져만 갔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사태를 보시고 깊이 후회하십니다. 그리고 홍수를 통해 모든 것을 없애리라고 마음을 먹게 됩니다(창세 6장 5-7절).

        오늘 제1성서 본문은 세계가 파멸하는 가운데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노아와 그로 인해 목숨을 건진 온갖 짐승들과 하느님이 다시 새로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이 계약을 통해 새로운 인류가 탄생되는 것이고, 과거의 했던 실수를 다시는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그 새 인류는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 계약을 자세히 보면 하느님 자신도 첫 창조와는 다른 현실 인식을 하고 계십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셨지만, 오늘 계약의 내용을 보면 이제 인간들에게 다른 피조물들을 맡기지 않고 하느님께서 직접 모든 생명체들과 계약을 맺으십니다(9장 10절, 12절). 이제는 하느님이 직접 자신의 창조세계를 다스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전 단락을 보면 처음 창조 때 인간에게 베푸셨던 복과 아주 유사한 구절이 나오는데 그 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식물만 먹던 인간에게 동물도 음식으로 허락되고, 모든 자연세계는 이제 인간들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짐승이든 인간이든 생명인 피를 흘리게 하는 자가 있다면 하느님께서 앙갚음을 하시겠다면서 생명을 함부로 다루지 말라는 아주 엄한 경고가 첨부됩니다(9장 1-7절). 다시는 홍수로 멸하지 않겠다는 징표인 무지개도 인간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스스로 다짐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으로 나타납니다(9장 12-17절).

        고기를 먹게 되었다는 것은 홍수 이후 인류의 생존이 자연이라고 하는 타자의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취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채식을 할 경우 줄기채소나 열매는 나무나 채소를 죽이지 않고도 양식으로 삼을 수 있는 반면 육식은 반드시 그 생명을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고기가 인간의 양식으로 허락되었다는 것은 인류의 생존이 이미 폭력을 수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자신의 생존을 빌미로 타자의 생명을 함부로 유린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많아졌음을 알려줍니다. 21세기까지 인류가 만든 문명과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풍족함은 잘 생각해 보면 자연을 착취하거나 다른 이의 피땀 위에 성립한 것입니다. 홍수 후 계약에서 하느님이 인류의 폭력에 강력한 경고를 하면서 이전에 인간에게 내리 축복을 수정하여 다시 모든 생명체와 계약을 맺는 것은 악습에 이미 물든 인간을 하느님이 파악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전반부를 살펴보면 인간은 하느님과 대화하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심지어 카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도, 하느님은 카인과 대화를 나누십니다. 그러나 카인의 후손으로 폭력이 확대됨을 잘 보여주는 라멕(창세 4장 23-24절)을 거쳐 노아 시대에 오면 사람은 더 이상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습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도 노아가 하느님께 한마디 할 법도 한데, 하느님의 명령만 나올 뿐 대화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인간은 이미 하느님을 잃어버린 세대가 되었고, 그래서 하느님은 이제 스스로 세계를 돌보아야만 했던 것이며, 생명을 유린하는 것에 대한 강한 규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느님 없이 과도한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인류에게 파멸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삶이 모두의 공멸로 가지 않으려면 자신의 생존이 타자의 생명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세심히 살펴야 하고, 타인을 위해서라면 조금 불편한 것을 감수하고 더 나아가 나 또한 다른 이를 위하여 자신의 피와 땀과 생명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전 인류를 멸하시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노아는 살아남았다는 사실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아 덕분에 많은 짐승이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오래도록 교회는 “노아의 방주”로 비유되곤 했습니다. 즉 교회는 세상이 스스로 붕괴될 만큼 타락한 그 순간에 다시 생명을 살리는 공간과 모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자를 이용해 먹으려고 할 때 교회는 노아처럼 그런 행동이 세상의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고 외치고 더 나아가 교회만큼은 타자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사회에 크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2008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 발표한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 의하면 조사 대상자 중에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은 18%,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8%였으며, 특히 비그리스도인의 경우는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8%이고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7%나 됩니다. 종교기관에 대한 신뢰도 평가에서도 가톨릭은 35%, 불교는 31%인데 비해 개신교는 18%로 가장 낮은 비율을 보이고 있고, 이 불신은 젊은 층일수록, 응답자의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수입이 많을수록 높았습니다.1)

        홍성태 상지대 교수는 프레시안에 올린 “스스로 ‘신’이 되려는 ‘장로’ 대통령”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한국 그리스도교의 문제점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사실 한국의 기독교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다. 시커먼 밤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시뻘건 십자가의 반문화적 행태, 좋은 말씀을 전하러 왔다며 남의 집 문을 멋대로 두드리는 외판원적 행태, 거리와 전철에서 멀쩡한 사람들을 죄인이나 바보 취급하는 비정상적 행태, 수천억 원의 돈을 들여서 거대한 교회를 짓는 경쟁에 골몰하는 개발꾼적 행태, 수많은 신도들의 공유재인 교회를 멋대로 자식에게 세습하는 반민주적 행태, 막대한 봉급과 이익을 챙기면서 세금은 사실상 한 푼도 내지 않는 비사회적 행태, 다른 종교를 배척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파괴하려 드는 비종교적 행태, 이권과 권력을 위해 정치꾼보다 더 강력히 정치적 활동에 몰두하는 세속적 행태 등은 그 중요한 예들일 것이다.”2) 


        이렇게 현재 한국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안팎으로 많은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비판을 듣고 스스로 정화하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는 세상에서 외면당해 사라지거나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기보다 오히려 악의 세력으로 남게 될 것입니다.

        대다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교가 이런 비난에 “그렇지 않다”라고 과감히 말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기 때문에 사실 어느 모임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말하기가 껄끄럽고, 또 누군가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인사를 하면 반갑기보다 “어떤 그리스도인일까” 하며 오히려 피하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입니다. 위에서 제시한 것 말고도 한국교회의 문제점들을 나열하라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이런 모든 교회의 문제점들은 교회가 “하느님의 현현인 예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비판적인 책을 내면서 그 제목을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 <예수 없는 예수 교회>, <예수를 살리는 교회, 예수를 죽이는 교회>,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등등으로 붙이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세계를 뒤덮고 있고, 원치 않는 식민지, 동족간의 전쟁을 겪고, 반세기가 넘게 분단체제 속에서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근현대의 격랑을 헤치고 살아온 한국인들은 국가의 발전과는 무관하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생존의 위협과 불안에 떨고 있고,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기에, 아직도 여전히 그리스도교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한 물음들을 물으며 구원의 빛이 교회로부터 자신들에게 비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말씀 드린 대로 한국교회는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실망과 절망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교회에 대해서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무엇이냐?”라고 묻는 물음에 대해서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믿음의 선배들은 크게 “하느님의 백성들의 모임, 예수 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공동체”라는 말로 답해 왔습니다. 그리고 각 지역에 개별적인 교회들이 있지만 세계교회는 오래도록 “하나의 보편적이고 거룩한 사도적 공동체가 교회다”라는 신앙고백을 해 왔습니다. 예배와 말씀의 선포, 세상을 향한 봉사, 제자 교육, 성령 안에서 이뤄지는 깊은 사랑의 친교를 통해 교회는 2000년의 역사 속에서 분명히 의미 있는 역할들을 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선배들의 고백들과 교회의 역할들을 하나씩 성찰하면서 향린교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부분들을 차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써 교회의 본질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프랑스의 가톨릭 신학자 로아지는 그의 책 <복음과 교회>에서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온 것은 교회였다.”라는 묘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동안 교회를 세운 적도 없고, 계획적으로 어떤 선택된 자들의 공동체를 소집하여 제도나 조직을 결성하지도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를 부른 것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열두 지파, 즉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새롭게 한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즉 예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그가 선포하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서 일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후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나자렛 예수를 기억하며 모였고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제2성서의 본문은 승천하시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소명을 주시는 부분으로 교회의 본질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선포하시고 이룩하시려 했던 하느님의 나라의 실현에 대해 묻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물음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가 오늘 지금 이 시간 세계와 우주를 통틀어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상황에 따라 각각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민족의 통일, 어떤 이에게는 양성의 평등, 어떤 이에게는 생존의 해결, 어떤 이에게는 마음의 평안 등등. 그러나 모든 인류와 생명이 갈망하는 하느님의 나라가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난 것은 아니며 여전히 우리 또한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때와 시기는 오로지 하느님만이 아신다고 하시면서 우리에게 또 다른 새로운 말씀을 주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뿐만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향린교회는 언제 어디서든 그 때와 시기가 이르기 전까지 세상 모든 이들에게 예수의 증인으로서 남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통해 예수가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적인 생애를 접고 공적인 생애를 사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승천 이후 교회가 본격적으로 생성되고 활동하게 되는 것은 오순절의 성령강림체험 이후였습니다. 예수는 사적인 사유와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하느님의 영 안에서 공적인 삶을 살았으며, 교회 또한 그렇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를 이루는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향린교회를 만들어가고 계십니까?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공적인 삶을 살기 위함입니까? 아니면 개인의 사적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함입니까? 옥한흠 목사의 아들인 옥성호라는 분이 쓴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엔터테인먼트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 성향이나 성서해석에 저는 많은 부분 동의할 수 없지만 그가 이런 책들에서 날카롭게 꼬집으려는 큰 뜻, 즉 오늘날의 그리스도교가 하느님을 위한 공적인 소명을 담당하기 보다는 개인의 사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깊게 숙고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고 목사들의 설교가 누구나 상식적으로 느껴지고 알 수 있는 예수의 삶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현대의 자본주의나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왜곡하고 있음을 이 책들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연속 하늘뜻펴기를 통해서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새롭게 조명해 보았지만 누구나 복음서를 상식적인 수준에서만 읽어봐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가르치는 가치관과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우리는 좁은 길을 가라 했고,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니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 준 뒤에 자신을 따르라고 했고,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는데 자신은 머리 둘 곳이 없다 했으며, 죄인들과 세리들의 친구라 했던 예수의 삶을 볼 수 있고, 불의에 대항하고, 평등의 식사를 제공하며, 목자 없이 유리 방랑하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 생명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악한 것들을 쫓아내고 치유하셨던 그 분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교회의 활동에서 이러한 예수의 삶과 가르침이 반복 재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향린교회를 통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예수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우리는 우리 자신인 이 교회를 만들어갈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까? 교회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예수를 머리로 하고 한 지체가 되어 온전히 예수의 몸이 되도록 하는데 여러분은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향린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교회와 달리 세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들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합당한 것인지, 충분한 것인지 우리는 더 세심하게 성찰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면 우리는 교회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 여러 기구들을 두고 민주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대부분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교회의 중요한 결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수결의 원칙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맞는 것인지는 좀 더 깊은 고민과 기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기도하면서 만장일치의 합의를 이뤄내야 할 것도 있고, 신앙의 눈으로 비춰보았을 때, 어쩌면 소수나 침묵하고 있는 이들의 속뜻이 하느님의 뜻에 더 맞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갓 돌이 지난 아이들과 놀아줄 때, 전 세계 어디에 가서도 늘 언제나 통하는 놀이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그것을 “까꿍놀이”라고 합니다. 얼굴을 가렸다가 갑자기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 앞에서 “까꿍”하지요. 그러면 아이들은 모두 까르르 하며 웃어댑니다. 아이는 부모의 환한 얼굴을 통해 자신에 대한 사랑을 느끼며 “세상은 살만한 곳이구나, 자신을 반겨주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고 이런 긍정적 사고는 그의 평생을 좌우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반대로 불안과 노여움, 슬픔이 담긴 부정적 상을 아이에게 보인다면 아이 역시 자신을 부정하고 울게 됩니다. 유아는 타인과의 정서적 조율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 당시 많은 메시아 운동이 있었는데, 대부분 지도자가 처형당한 이후에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수 운동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를 따랐던 이들이 예수운동으로 인해 삶의 의미를 느꼈고, 예수의 부활을 통해 이 세상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하늘의 희망과 위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이런 하늘의 희망을 보여 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까꿍놀이”입니다. 하느님 스스로 세상을 더 이상 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계속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고, 바로 교회는 이 땅의 사람들에게 무지개가 되어야 합니다. 인류는 하느님이라는 전적 타자와의 정서적 조율을 통해서만 참다운 자기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향하신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을 나눌 때입니다. 사랑이란 자신의 것을 다 내주면서도 기쁨과 희열에 넘치는 경험입니다.

        사랑하는 향린교우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를 지배하려 들고,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고 파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이뤄질지 모르는 우리들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그리워하며 하늘만 쳐다보는 제자들마냥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증인이고,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따른다면, 우리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하느님 나라는 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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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이원규 지음, <힘내라 한국교회>, 137-138. 
2) “스스로 '신'이 되려는 '장로' 대통령”, 프레시안 [홍성태의 세상읽기], 2010. 02. 10 기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