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8_성령강림 11_최영선 권사, 모찌즈키 사토시(望月 智) 목사

평화의 머릿돌 平和のかなめ石

이사야 28:14-16 ; 사도행전 4:1-13

찬29장, 성도여 다함께 찬475장, 인류는 하나되게 국찬116장, 평화가 있기를



[최영선 권사-우치난츄, 그리고 나의 안식년]



2006년 5월 23일 욥기 12장 12절에서 16절 말씀으로 “모두가 모두에게”라는 제목의 평신도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강단에 서게 된 것이 무슨 의미일까?’하고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말씀은 목사님이 항상 하시는 것이므로 오늘은 저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50대 후반에 처음으로 기독교인이 되었고 교회는 향린교회가 처음입니다.

세상에는, 무엇인가 신비로운 힘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는 했지만, 향린교회에 오기 전에 그 많은 젊은 날을 무신론자로 살면서도 이 세상을 살아오는데 조금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가끔 교회의 건물이나 불빛 찬란한 십자가나 성경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따분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또는 목청이 터지라고 천국을 외치면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대할 때 마다 참 희한한 또 다른 세상이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하였을 뿐입니다.



저는 제가 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하였으며 그 일과 관련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사는 것으로 세상은 너무 재미있었고 저 역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야릇한 병이 있었습니다.

어느 곳이고 7년 이상 머물 수 없었고 7년이 지나도 그곳에 남아있는 저를 보면 숨이 막혀서 더 이상 그 일을 계속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같이 일할 수 있는 곳이라도 7년은 제가 머물 수 있는 한계였고, 저는 그동안 저를 소진시켰기 때문에 떠남은 저에게 언제나 출발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되어 향린교회에 온지 7년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몇 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이곳을 떠나면 기독교인이 절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이 저의 신념이었고, 또 떠나지 못한 것은 이곳이 바로 향린교회이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향린교회는 제가 자유 영혼으로 선택한 곳이고, 하나님이 저를 이곳으로 데려다 주신 것이라고 믿을 뿐입니다.

저의 생애에서 한결같이 몸부림쳤던 7년은 저의 또 다른 희년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2011년 1년 동안 저에게 안식년을 주려고 합니다.

제가 급히 서두르지 않는다면 저에게 시간과 건강이 허락되지 않을 것 같고 저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마다 저에게 속삭여준 약속을 지키려 합니다. 그것도 또 제가 저에게 주는 상입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나라, 만나보지 못한 낯선 사람들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20년 동안 주일마다 만났던 얼굴들이 많이 그리워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4월30일부터 5월5일까지, 5박6일의 오키나와 여행은 이러한 조바심 때문이었습니다.

오른팔이 너무 아파서 그 기능이 마비될 것 같은 초조함에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행은 저를 가장 기쁘게 합니다. 일본의 가장 북쪽인 북해도를 가보았으니까 가장 남쪽에 있다는 오키나와를 가보자는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오키나와는 장수촌이라는 것과 홍길동이 국가에 공헌해서 병조판서라는 벼슬을 주었지만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그의 이상향인 율도국으로 떠났는데 그곳이 바로 오키나와라는 정도의 상식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어찌 그렇게도 우리나라와 닮았는지 특히 제주도와 많이 비슷했습니다.

그들의 수호신이기도 한 “시사”가 지붕 위마다 정다운 모습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옛날 우리조상이 경외하던 “해태”와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오키나와는 원래 류큐라고 불리던 일본과는 다른 왕국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래,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일본인에 의하여 집단사를 강요당할 수밖에 없었던 순박한 류큐인의 비극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광란에 휘말려 인간이기를 포기했는지 여러 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쟁은 광기, 그 자체이며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커다란 재앙인지 새삼스럽게 전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신을 부를 때 일본말과는 다른 오키나와 말로 ‘우찌난쮸’라는 말을 씁니다.



후텐마기지에서 더 이상 미군기지 때문에 아름다운 바다를 빼앗길 수 없다고 평화시위를 하는 우찌난츄들을 보았고, 게라마 해협을 지날 때는 이 끝없이 넓은 바다가 오키나와 전쟁 때 피바다가 되었으며 미군 배가 이 바다위에 새까맣게 떠 있어서 그 미군 배를 하나하나 밟고 건너면 쾌속정으로 40분이나 걸리는 도까시끼섬까지 갈 수 있었다는 진정한 우치난츄의 탄식을 들었습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야심과 전쟁의 광기가 순박한 우치난츄를 제물로 바쳐버린 현장을
방문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민족이 일제치하에서 겪은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평화를 기원하는 여러 개의 위령탑에는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의 이름이 씌어 있었는데 피해자와 가해자의 이름이 구별 없이 나란히 씌어져 있었고) 남한과 북한으로 나뉜 채 우리나라 사람들의 이름도 무수히 많아 슬펐습니다.

특히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서 감동한 것은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언론은 물론 오키나와 고급 공무원들까지 현민과 한편이 되어 총궐기대회에 함께 참석하여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우리의 경찰이 장갑차나 앞세우면서 위협하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습니다.



끝으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한 배봉기 할머니를 비롯, 무고하게 희생된 위안부 여성들을 기리기 위해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세운 ‘아리랑비’에 새겨진 비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아리랑비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페리를 타고 한시간 정도 걸리는 도까시끼섬의 양지바른 곳에 있습니다.



지금 나는 어느 곳에서 어디로 가려는가

나는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어머님의 나라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가리라


한줄기 원한의 길을

한줄기 원한의 굴레를 더듬어가면

고인들의 통곡소리 들려오누나

어른들이여 굴욕의 빠진 아낙네들이여

나는 방금 그대들의 원한의 품속에서 태어났노라.


그대들이자 나 자신이로다

바로 그대들은 우리들 품속에서 다시 소생하리라

모두의 영원한 새로운 생을 영위하리라.




[모찌즈키 사토시 목사-평화의 머릿돌]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키나와에서 온 모치즈키 사토시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미안하지만 한국말이 아직 서투른데 일본말로 하겠어요.

일단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일본 본토출신으로 오키나와에서 18년동안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2007년부터 매년, 향린교회의 오키나와 평화기행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키나와에서 온 제가 이렇게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올해는 ‘한일 강제병합’으로부터 100년이 됩니다. 일본이 한국(과 북조선)에 안긴 고통을 생각하면 참으로 죄송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일본의 근현대 역사를 돌아볼 때, 한국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은 일이겠지만, 먼저, 한국어를 공부하여 일본과 한국 사이의 [다리]역할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사진 1. 오키나와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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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푸른 바다와 하늘, 따뜻한 섬 등일 것 입니다. 특히 겨울이 되면 골프나 프로야구 캠프를 위해 한국으로부터도 많은 관광객들이 오키나와에 옵니다.

 


[사진2. 오키나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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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는 일본본토와는 다른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가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전까지 오키나와에는 임금님이 있었습니다. 오키나와 말은 [사투리/방언]이 아닌 [오키나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 3. 오키나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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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류큐(
琉球)]라고 불리웠던 오키나와 역사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실제 14-16세기에 걸쳐 류큐는 독립국가로서 중국,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무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류큐 역사를 생각해보면 [오키나와는 일본이 되었다가, 일본이 아니었다가]합니다. 류큐왕국은 1609년 사쯔마(薩摩)의 침략을 받습니다. 그럼에도 류큐왕국은 계속 되어 [중국의 속국] 형태로 중국과 무역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이 지배했지요.


근대로 접어들어, 일본은 1872년 류큐왕국을 폐지하고 류큐번(
藩)이라고 하다가 1879년에는 오키나와 현(県)으로 만듭니다. 류큐왕국을 완전히 폐지한 것을 [류큐처분(琉球処分)]이라고 부릅니다. 류큐는 [처분]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는 류큐의 영유권이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일본은 오키나와 본섬 남쪽에 있는 미야꼬 섬(
宮古島)과 이시가키 섬(石垣島)을 중국에게 주고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것을 ‘선도분도안(先島分島案)’이라고 부릅니다. 1894년 청일 전쟁이 일어나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오키나와 남단에 있는 섬이 중국이 될 뻔 했습니다. 현재 두 섬 모두 오키나와 현에 속해 있습니다.


[사진 4. 오키나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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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1945년 오키나와 전쟁의 격전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민 4명 중 1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진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 슈리(首里) 교회 모습입니다. 전쟁 중에는 일본군이 교회를 사용했기 때문에 미군이 교회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의 특징 중 하나는, 승산 없는 ‘버린 돌 작전’이었다는 것 입니다.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미국에게 타격을 가하고자 한 전쟁이었습니다. 또한 이 전쟁을 통해 [군대는 주민을 지키지 않는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장 많이 희생된 것은 오키나와 주민이었습니다.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한 오키나와 주민들이 상당히 많았습니다. 일본군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처형을 당했다 던지, 숨어있던 장소에서 일본군에 의해 쫓겨난다던지, 그도 모자라 먹거리를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군대가 주민을 지키지 않고, 도대체 무엇을 지켰던 것일까요? 물론 그들은 [국가를 지킨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주민을 지키지 않으면서 어떻게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사진 5. 기지의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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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기지의 섬]이라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오키나와 전쟁은 끝났지만, 미군이 오키나와를 지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1950년대에는 오키나와에 새로운 기지가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은 한국전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사진 6. 후텐마(普天間)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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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미국으로부터 반환된 오키나와는 또다시 일본의 오키나와 현이 되었습니다. 면적, 인구 모두 전체 일본의 1%밖에 되지 않는 오키나와에는 현재도 일본에 있는 75%의 미군기지가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오키나와 속에 기지가 있는 것] 아니라, [기지 속에 오키나와가 있다]라고 할 정도 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오키나와 본섬 중부에는 특히 기지가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차로 어디를 가더라도 가는 곳마다 기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진 7. 미군 헬리콥터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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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제가 시무하는 시마시 교회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미군 헬리콥터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위험한 상태는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키나와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류큐시대는 오키나와 말로 [토우누유-당의 세상(唐の世)]라고 불리웠습니다. 류큐 처분 후에는 [야마토누유-일본 세상(大和の世)]가 되었고, 오키나와 전쟁 후에는 [아메리카유-미국 세상(アメリカ世)]가 되었습니다.

오키나와는 약 130년 동안 일본/중국~일본~미국~일본으로 [세상이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예를 들어, 1945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인이 교통사고를 일으키면 무죄가 선언되곤 하였습니다. 횡단보도에서 사람을 치더라도 신호를 못 봤다고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미군이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헌법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1972년에는 달러를 쓰다가 엔화로 바뀌었습니다. 1978년에는 교통방식이 달라져 차 운행이 좌측통행으로 바뀌었습니다. 미국식으로부터 일본식으로 바뀐 것이지요. 여러분들 어떻습니까? 내일부터 반대로 운전하라고 하면 잘 하실 수 있습니까?


일본은 형편이 좋을 때는 [오키나와를 일본]으로, 형편이 나빠지면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라고 해왔습니다. 지난 주에는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후텐마 기지의 비행을 금지하도록 촉구하는 재판의 판결이 있었습니다.

[후텐마 기지의 현 상황은 심하다. 그리고 또 다른 추락 위험이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 매우 시끄럽다. 그러나 여기는 미군기지이기 때문에 일본이 비행금지를 요구할 수는 없다]였습니다. 도대체, 오키나와는 일본인 것일까요? 어느 나라의 재판소이란 말입니까?

 


오늘 함께 읽은 사도행전의 11절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원래는 시편 118편 22절에 있는 말씀이고, 복음서의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에서 예수께서 인용하신 말이기도 합니다. [버린돌]은 예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또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것은 예수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13절을 통해 제자인 베드로와 요한의 자신있는 태도와 함께 그들이 배운 것 없는 보통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주변사람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그리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던 때, 예수를 버리고 도망간 제자들이 어떻게 자신 있게 말하는 일이 가능했을까요?

이는 성령강림 사건에 의해 그들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라는 하느님의 능력을 받음으로 그들은 변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변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예수는 집짓는 사람들 곧 여러분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분입니다."


[버린 돌
]은 오키나와 전쟁 당시의 [버린 돌 작전]을 떠오르게 합니다.


성서는 이 버린 돌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일본으로부터 버림당한 것으로 보이는 오키나와가 오히려 커다란 역할을 감당할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사진 8. 태평양의 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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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가 긴장상태가 되면,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도 긴장상태가 됩니다. 미군은 오키나와를 [keystone of the Pacific], [태평양의 머릿돌]이라고 부릅니다. 군사상 중요한 거점이라는 것 입니다.

1972년 이전, 오키나와에 있던 미국인들의 자동차 번호판에는、「keystone of the Pacific」이라고 씌여져 있었습니다.


성서는
버려진 것’, ‘작은 것’이 커다란 역할을 해낸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의 제자들도 약한 사람들이었지만, 성령을 통해 자신감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키나와가 커다란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오키나와를 [태평양의 머릿돌]이 아닌 [평화의 머릿돌]이 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오키나와를 시작으로 한반도, 동아시아, 세계 평화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는 평화를 함께 만들어 갑시다.


[사진 9. 슈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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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550년전 오키나와의 슈리성에 걸려있던 [만국진량(万国津梁)의 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진량(津梁)]이라는 것은 [다리]라는 말로 류큐가 ‘세계의 다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실제 14-16세기에 류큐는 중국, 조선, 일본,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무역을 했습니다.


오키나와가 군사 거점이 아닌 [평화의 다리]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며, 함께 행동해 나갑시다.




[파송사-임보라 목사]

편안히 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누치두우타카라.

생명이야 말로 참 보물입니다.


평화를 입으로만 외쳐서는 전쟁광들을 잠재울 수 없습니다.

전쟁반대는 우리 생활 속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싸운다면 그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소비와 향락에 빠져 산다면 그들은 옳거니 하고 즐거워할 것입니다.

불규칙한 생활로 건강을 잃는다면 그들은 기회를 엿보게 될 것입니다.

시간을 허비하며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곧 우리를 지배하려 들 것입니다.

전쟁광들을 기쁘게 하지 않도록 생활을 다잡아 사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일상의 예배가 시작되는 지금,

평화를 삶 속에서 일구며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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