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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text_2)
목회자칼럼에 대한 안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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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수 51
교우님들, 안녕하세요?
조헌정목사입니다.
향린을 떠난지 불과 한 주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향린 향수병이 생깁니다. 아마도 지난 주간 아이티에서 며칠을 보낸 탓인 것 같습니다.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던 외국에서의 하루는 마치 서울의 한달같은 느
낌이 들거든요. 지금은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어제 저녁 서울 시간에 맞춰 예배 동영상을 접촉하였는데, 해외에서는 안된다고 글이 떠오르던군요.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인터넷이 전지구촌을 하나로 연결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이야기 1- 네팔 트레킹 이야기]
저는 이번 6개월 안식년을 네팔의 트레킹으로 시작했었습니다. 작년 한달동안 세 개의 트레킹 코스(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abc, 랑탕)를 연속으로 하고 나서 올해 또 하나의 잘 알려진 안나푸르타 일주 코스를 도전한 것입니다. 이 코스는 길게는 한달, 짧게는 보름에서 20일을 하여야 하는 코스인데, 저는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만 하였습니다. 그래 가장 핵심적인 부분(5400미터 정상을 넘는 코스)이자 가장 험한 코스를 하였습니다. 하루 10시간씩 보통 사람 보다는 1,5배 심하게 말하면 2배 속도로 진행을 한 셈입니다.
조금 무리가 되었던지, 양쪽 발바닥에 큰 물집이 생기고, 작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릎 통증까지 있어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작년에는 처음 며칠만 배낭을 매고 나머지는 배낭을 매지 않았었는데, 올해는 백두대간 훈련을 겸해 약 15킬로 정도의 배낭을 매고 다녀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사히 마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기 계절이라 아주 적은 숫자의 트레커들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롯지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기이진 하지만 다행히 비는 밤에만 오고 아침에는 항상 비가 멈춰주어 이것 또한 큰 은혜였습니다. 거의 날이 맑아 설산들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자연의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어가며 지구의 지붕이라 일컫는 수억만년의 에베레스트 산맥의 모습들을 지나치노라면 인간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 목사 후배들을 만나면 꼭 네팔 트레킹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안나푸르나 일주 코스는 작년에 하였던 다른 코스에 비해 롯지 시설은 조금 더 나았고, 길 또한 정부가 산악용 지프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어 때때로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을 다녔습니다. 약간은 불만스럽게도 했지만, 주민들을 위한 길이니 필요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산꼭대기까지 전기도 들어와 밤에 촛불을 켤 필요도 없었고, 그런대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었습니다. (4,500미터의 롯지에서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는 있었지만, 샤워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형성된 마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을 흐르는 빙하 물이 석회로 인해 뿌였다 못해 검은 흙탕물이어서 식수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곳은 모두 물이 맑았는데, 이곳은 물이 너무 시커먼해서 처음에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러나 산 반대편은 땅이 괜찮아서 물이 그리 시커먼지는 않았습니다. 반대편의 걷지 못한 남은 일주 코스는 25인승 산악용 버스를 이용하여 내려왔는데, 마을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수천미터 산을 빙빙 도는 길이라 때때로 매우 위험천만한 길을 지나가기도 하여 가슴이 섬뜩해지는 순간을 여러번 만났습니다. 그리고 간밤에 비가 많이 오면 길이 끊기는 수가 많습니다. 꼬박 이틀을 계속 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3번이나 길이 끊어져서 도보로 건너야 했고, 건넌 후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코스에서는 전연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포카라에 도착하여 작년에 만났던 일본인 부부 친구를 만났습니다.(부인이 간호사이고 남편은 화가인 이 젊은 부부는 3년째 이곳에서 일본 크리스찬 의사협회의 파송을 받아 부모가 감옥에 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갑게 만나 가져간 선물을 주고, 몇 분의 권사님들이 경비로 모아준 돈을 선교비로 전해 주었습니다.
[이야기 2 - 아이티 방문 이야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지난 주일 저녁 기장 대표 방문단(4명)의 일행으로 아이티를 향해 떠났습니다. 13시간 밤 내내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니 또 밤이었습니다. 그래 연속하여 하루밤을 뉴욕에서 자고 그 다음날 오후에 아이티 공항에 도착했지요. 비행장 입국 시설이 마치 우리나라 1950년대 막사와 같아 함께 간 목사님이 깜짝 놀라더군요. 세계의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본래 원주민이 살았던 이 섬은 컬럼버스 이후 유럽 사람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모두가 몰살을 당하고 불란서의 식민지가 되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백년전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노예들이 나라를 세운 세계 최초의 나라입니다. (마치 애굽의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셈입니다.) 그래 가난하긴 하지만, 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아시는대로 본래 가난한데다가 6개월 전에 일어난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도시 곳곳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이 부서진 건물 잔해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현재 UN은 정부 건물만 도와주고 있고, 개인 건물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손을 놓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마중을 나온 미국인 선교사 부부(UCC 교단과 디사이플 교단이 함께 파송한 푸에토리코인)의 인도를 받아 호텔을 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함께 한 두 목사님들이(저보다 몇 년 선배이심) 호텔이 너무 낡았고, 에어콘도 안나오고, 습기가 차고 냄새가 나니 다른 호텔로 바꿔달라고 요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계 3국을 다녀본 경험도 있고, 이 정도면 네팔의 롯지에 비하면 할아버지 격이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냄새가 나니 2층 방으로 바꿔달라고 얘기를 했더니 방이 없다고 하더군요. 두 목사님을 설득하여 그냥 머물도록 하였는데, 후에 한인 선교사(채수일한신대 총장의 사위, 감리교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 파송받았는데, 현재 이곳에 와서 사역을 하고 있음)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대부분의 호텔들이 모두 부서져서 지금 이 호텔이 이곳에서 최상의 호텔이고 자신은 귀한 손님을 위해 이곳의 방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식당에서 이곳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COSPENEH라는 개신교단의 지도자들이었는데, 이 교단의 배경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이티는 인구 9백만의 나라인데, 불란서의 나폴레온 군대를 이기고 독립을 하긴 하였지만,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간 뒤발리에 부자가 오랫동안 독재를 하여왔기에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 심각했습니다.
백인 3%, 혼혈인 5%가 모든 부와 권력을 갖고 92%의 흑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 약 25년 전부터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깸을 얻은 소수의 흑인 지도자들이 백인 중심의 현재의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용납하며 영혼구원만을 외치는 서구 가톨릭과 개신교을 배척하고 이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자신들의 독립적인 교회를 세워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예수가 함께 하고자 했던 오흘로스의 민중, 소외되고 가난한 민중들의 주인이 되는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스페네라는 교단 모임입니다. 여러 교단들이 모인 약간 느슨한 형태이지만, 사회적 정의와 경제 분배와 평등 사회를 목표로 하는 매우 깨어있는 교단입니다. 본인들 얘기로는 인구 900만 가운데, 자신들의 교회 교인들이 160만이라고 합니다. 7천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동네의 사람들을 모두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마을 공동체 형태의 교회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단순히 주일에 한번 예배만 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매일 여러 기도와 성서 공부 모임이 진행되고, 학교와 간이진료소, 서민금고 등 주민들의 실생활의 중심이 되는 지역주민 교회였습니다. 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교회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언론의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주창한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이야기하고 서구신학과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자주민족교회으로서의 기장 교단의 배경을 말하자 그들은 매우 기뻐하며 더 많은 신학과 교회의 교류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은 목사들이긴 하지만,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목사들도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목사들은 모두 정부가 인정하는 자격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들은 워낙 가난하여 교육을 받지 못해 자격증을 얻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교인들이 너무 가난하여 월급이 없어 모든 목사들은 갖가지의 세상 직업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또 지진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 있지만, 우리는 단지 물질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다음 날은 본부의 5층 건물이 있었던 장소를 가보았습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공터에서는 십여개의 임시 천막을 세우고 그 속에서 책상도 없이 약 680여명의 초중고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티 학교의 85%의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천막교실을 하나하나 다 방문하여 인사를 시켰던 총회장 목사님 얘기인즉, 지진이 있었던 그날 이 본부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 19명이 건물에 깔려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지진으로 희생된 사망자수가 20만을 훨씬 넘으니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진이 오후 5시에 일어났으니 망정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희생자들이 생길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 코스페네 교단의 총회장의 23세난 아들 또한 희생자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그만 양쪽 다리가 건물 잔해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아버지인 총회장 목사님은 그날 밤을 세워가며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부활의 몸으로 다시 만나자고 서로 얘기를 나눴다고 말합니다. 다리를 짤라낼수도 없고, 건물 잔해를 드러낼수도 없어 그냥 서로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하는 일 외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던 셈입니다. 물론 당시의 현장은 자신의 아들 외에 다른 사람들 또한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을 것이니, 아들의 손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총회장 부부는 (부인은 그 학교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음) 자신의 아들이 죽어간 그 죽음의 현장을 부활의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민중들의 부활의 현장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가 곧 자기 아들의 미래임을 알고 기쁨과 희망 속에서 힘차게 일하던 저들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후에는 우리가 돕고자 하는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로 대여섯살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아이들 2백명이 있었습니다. 본래 있던 건물이 무너져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현재 이곳은 돈이 있어도 집이나 건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고아원은 잠자는 시설은 없었습니다. 그럴만한 운영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친척이나 아는 집에서 집안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가사노동자인 아이들입니다. 낮 동안만 이곳에 와서 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촐망촐망한 눈을 가진 저들이 멀리서 우리가 왔다고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공연은 대부분이 춤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아이티 민속춤이었는데, 아주 몸동작이 빠른 춤들이었는데, 제가 그만 기가 발동을 해서 저들과 함께 한 곡을 추었습니다.(하하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더군요.)
저녁에 다시 코스페네 교회 지도자들과 회의를 갖고 후속 모임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저들은 말합니다. 현재 외국에서 많은 단체들과 국가의 지원이 있지만, 그 지원들은 모두 위에서 사라지고 가난한 자들의 손에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선교사님들의 얘기인즉, 현재 11,000개의 NGO 단체가 일하고 있는데, 기금의 85% 이상은 모두 운영비로 사라지고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티 정부 또한 무질서의 혼란 속에 있어, 컨테이너가 항구에 도착을 해도 이를 빼내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말합니다. 실제 어떤 한인 목사님은 4개의 컨테이너에 물건을 실고 왔지만, 구비 해오라는 서류가 너무 많고 이를 준비해도 다른 요구 조건이 많아 이를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컨테이너 한개당 하루 항구에 머무는 벌금이 150불입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백인에 혼혈인들이라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복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셈입니다.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한 분배와 교육의 기회를 요구하는 코스페네 교회 지도자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요구가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남미의 교회들은 가보지 못해 잘 알지 못하지만, 6.70년대의 해방신학은 그냥 이론으로 사라진 신학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교회 복음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돗대기 시장같은 무질서 속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뉴욕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위해 한 한인 식당에 갔습니다. 음식물이 넘쳐 남은 물론이요 화장실을 갔는데 소변을 본 아이 하나가 손을 씻고 손을 닦는데 페이퍼 타월 한장이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서너장을 계속 뽑아내 한번 쓰윽 닦고는 버리는 일을 보면서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가 뽑아낸 그 큰 휴지들은 물한방울 묻지 않은 채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아이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이티에서는 화장실을 찾기도 힘들었지만, 화장실에 가더라도 화장지가 없습니다.(그것도 화장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시설입니다.) 30여년전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맥도날드 식당을 갔는데, 한 미국 아이가 콜라가 바닥에 엎지러지자(식탁이 아닌 바닥!) 이를 닦기 위해 한뭉큼의 냅프킨을 꺼내더니 이를 닦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만, 비행기로 불과 3시간 차이의 아이티와 미국, 같은 날 아침과 저녁의 사회 상황은 너무나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는 세계 최고의 부자 강국, 다른 하나는 여기에 예속되어 있는 세계 최고의 가난한 나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태양열 아래 허허벌판 광야 같은 곳에 UN이 세워 놓은 2만개의 즐비한 텐트를 바라보면서, 저들은 언제 저 텐트 생활을 벗어나 직업을 갖고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을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80%가 넘는 실직율, 공장이 무너지기 전 하루 3불이라도 벌었지만, 지금은 그것 마저 잃어버린 저 가난의 나라 아이티, 그러나 흑인 노예들이 백인들과 싸워서 세운 세계 유일의 독립국가 아이티. 미국 독립 몇 년후에 독립이 되었으니 미국의 영향을 받아 독립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현대판 식민지로 전락하여 미군들이 거주하고 미국의 경제적 노예로 전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오늘은 미국이 독립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백인이 백인들을 대항해서 세운 나라,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여 세웠지만, 본래 이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원주민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의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아이티나 푸에토리코와 같은 소수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푸에토리코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티 교회 지도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남북한의 통일을 기도하겠으니 여러분들은 아이티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저들이 진정 사회 부정의와 경제 불평등을 타파하고 인종 차별을 벗어나 모든 국민이 하나되는 그날이 바로 세계의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곧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그날임을 믿고 기도합니다.
2010년 7월 4일 주일 아침 미국 워싱톤에서
조헌정목사입니다.
향린을 떠난지 불과 한 주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향린 향수병이 생깁니다. 아마도 지난 주간 아이티에서 며칠을 보낸 탓인 것 같습니다. 전혀 경험해보지 않았던 외국에서의 하루는 마치 서울의 한달같은 느
낌이 들거든요. 지금은 미국에 돌아왔습니다.
어제 저녁 서울 시간에 맞춰 예배 동영상을 접촉하였는데, 해외에서는 안된다고 글이 떠오르던군요. 참 실망스러웠습니다. 인터넷이 전지구촌을 하나로 연결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이야기 1- 네팔 트레킹 이야기]
저는 이번 6개월 안식년을 네팔의 트레킹으로 시작했었습니다. 작년 한달동안 세 개의 트레킹 코스(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abc, 랑탕)를 연속으로 하고 나서 올해 또 하나의 잘 알려진 안나푸르타 일주 코스를 도전한 것입니다. 이 코스는 길게는 한달, 짧게는 보름에서 20일을 하여야 하는 코스인데, 저는 시간이 없어서 일주일만 하였습니다. 그래 가장 핵심적인 부분(5400미터 정상을 넘는 코스)이자 가장 험한 코스를 하였습니다. 하루 10시간씩 보통 사람 보다는 1,5배 심하게 말하면 2배 속도로 진행을 한 셈입니다.
조금 무리가 되었던지, 양쪽 발바닥에 큰 물집이 생기고, 작년에는 느끼지 못했던 무릎 통증까지 있어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작년에는 처음 며칠만 배낭을 매고 나머지는 배낭을 매지 않았었는데, 올해는 백두대간 훈련을 겸해 약 15킬로 정도의 배낭을 매고 다녀서 더욱 그러했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무사히 마친 것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우기 계절이라 아주 적은 숫자의 트레커들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롯지는 텅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기이진 하지만 다행히 비는 밤에만 오고 아침에는 항상 비가 멈춰주어 이것 또한 큰 은혜였습니다. 거의 날이 맑아 설산들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자연의 물소리 바람소리를 들어가며 지구의 지붕이라 일컫는 수억만년의 에베레스트 산맥의 모습들을 지나치노라면 인간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 목사 후배들을 만나면 꼭 네팔 트레킹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안나푸르나 일주 코스는 작년에 하였던 다른 코스에 비해 롯지 시설은 조금 더 나았고, 길 또한 정부가 산악용 지프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어 때때로 좁은 길이 아닌 넓은 길을 다녔습니다. 약간은 불만스럽게도 했지만, 주민들을 위한 길이니 필요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산꼭대기까지 전기도 들어와 밤에 촛불을 켤 필요도 없었고, 그런대로 따뜻한 물로 샤워도 할 수 있었습니다. (4,500미터의 롯지에서는 태양열을 이용한 전기는 있었지만, 샤워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형성된 마을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곳을 흐르는 빙하 물이 석회로 인해 뿌였다 못해 검은 흙탕물이어서 식수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세곳은 모두 물이 맑았는데, 이곳은 물이 너무 시커먼해서 처음에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러나 산 반대편은 땅이 괜찮아서 물이 그리 시커먼지는 않았습니다. 반대편의 걷지 못한 남은 일주 코스는 25인승 산악용 버스를 이용하여 내려왔는데, 마을이 많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수천미터 산을 빙빙 도는 길이라 때때로 매우 위험천만한 길을 지나가기도 하여 가슴이 섬뜩해지는 순간을 여러번 만났습니다. 그리고 간밤에 비가 많이 오면 길이 끊기는 수가 많습니다. 꼬박 이틀을 계속 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3번이나 길이 끊어져서 도보로 건너야 했고, 건넌 후에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코스에서는 전연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포카라에 도착하여 작년에 만났던 일본인 부부 친구를 만났습니다.(부인이 간호사이고 남편은 화가인 이 젊은 부부는 3년째 이곳에서 일본 크리스찬 의사협회의 파송을 받아 부모가 감옥에 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갑게 만나 가져간 선물을 주고, 몇 분의 권사님들이 경비로 모아준 돈을 선교비로 전해 주었습니다.
[이야기 2 - 아이티 방문 이야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지난 주일 저녁 기장 대표 방문단(4명)의 일행으로 아이티를 향해 떠났습니다. 13시간 밤 내내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니 또 밤이었습니다. 그래 연속하여 하루밤을 뉴욕에서 자고 그 다음날 오후에 아이티 공항에 도착했지요. 비행장 입국 시설이 마치 우리나라 1950년대 막사와 같아 함께 간 목사님이 깜짝 놀라더군요. 세계의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입니다.
본래 원주민이 살았던 이 섬은 컬럼버스 이후 유럽 사람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모두가 몰살을 당하고 불란서의 식민지가 되어 아프리카 노예들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백년전 노예들이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게 되는데, 노예들이 나라를 세운 세계 최초의 나라입니다. (마치 애굽의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운 셈입니다.) 그래 가난하긴 하지만, 나라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아시는대로 본래 가난한데다가 6개월 전에 일어난 엄청난 지진으로 인해 도시 곳곳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이 부서진 건물 잔해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현재 UN은 정부 건물만 도와주고 있고, 개인 건물은 스스로 해결하라고 하는데, 거의 대부분이 손을 놓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마중을 나온 미국인 선교사 부부(UCC 교단과 디사이플 교단이 함께 파송한 푸에토리코인)의 인도를 받아 호텔을 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함께 한 두 목사님들이(저보다 몇 년 선배이심) 호텔이 너무 낡았고, 에어콘도 안나오고, 습기가 차고 냄새가 나니 다른 호텔로 바꿔달라고 요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세계 3국을 다녀본 경험도 있고, 이 정도면 네팔의 롯지에 비하면 할아버지 격이라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소한 냄새가 나니 2층 방으로 바꿔달라고 얘기를 했더니 방이 없다고 하더군요. 두 목사님을 설득하여 그냥 머물도록 하였는데, 후에 한인 선교사(채수일한신대 총장의 사위, 감리교에서 도미니카공화국에 파송받았는데, 현재 이곳에 와서 사역을 하고 있음)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대부분의 호텔들이 모두 부서져서 지금 이 호텔이 이곳에서 최상의 호텔이고 자신은 귀한 손님을 위해 이곳의 방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한다고 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녁 시간에 식당에서 이곳 교회 지도자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들은 COSPENEH라는 개신교단의 지도자들이었는데, 이 교단의 배경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아이티는 인구 9백만의 나라인데, 불란서의 나폴레온 군대를 이기고 독립을 하긴 하였지만,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그간 뒤발리에 부자가 오랫동안 독재를 하여왔기에 빈부의 격차가 너무나 심각했습니다.
백인 3%, 혼혈인 5%가 모든 부와 권력을 갖고 92%의 흑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 약 25년 전부터 해방신학의 영향으로 깸을 얻은 소수의 흑인 지도자들이 백인 중심의 현재의 부조리한 사회 구조를 용납하며 영혼구원만을 외치는 서구 가톨릭과 개신교을 배척하고 이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자신들의 독립적인 교회를 세워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곧 예수가 함께 하고자 했던 오흘로스의 민중, 소외되고 가난한 민중들의 주인이 되는 교회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코스페네라는 교단 모임입니다. 여러 교단들이 모인 약간 느슨한 형태이지만, 사회적 정의와 경제 분배와 평등 사회를 목표로 하는 매우 깨어있는 교단입니다. 본인들 얘기로는 인구 900만 가운데, 자신들의 교회 교인들이 160만이라고 합니다. 7천개의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가난한 동네의 사람들을 모두 교인으로 받아들이는 마을 공동체 형태의 교회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단순히 주일에 한번 예배만 드리는 교회가 아니라, 매일 여러 기도와 성서 공부 모임이 진행되고, 학교와 간이진료소, 서민금고 등 주민들의 실생활의 중심이 되는 지역주민 교회였습니다. 나라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니 교회가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언론의 자유와 경제적 평등을 주창한 우리나라의 민중신학을 이야기하고 서구신학과 선교사들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자주민족교회으로서의 기장 교단의 배경을 말하자 그들은 매우 기뻐하며 더 많은 신학과 교회의 교류를 원했습니다. 자신들은 목사들이긴 하지만, 정부가 인정하지 않는 목사들도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곳의 목사들은 모두 정부가 인정하는 자격증을 받아야 하는데, 그들은 워낙 가난하여 교육을 받지 못해 자격증을 얻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고등학교 졸업장이 있어야 합니다.) 게다가 교인들이 너무 가난하여 월급이 없어 모든 목사들은 갖가지의 세상 직업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가난하고 또 지진으로 엄청난 고통 속에 있지만, 우리는 단지 물질적인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다음 날은 본부의 5층 건물이 있었던 장소를 가보았습니다. 완전히 무너져 내려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위의 공터에서는 십여개의 임시 천막을 세우고 그 속에서 책상도 없이 약 680여명의 초중고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티 학교의 85%의 건물이 무너졌습니다. 천막교실을 하나하나 다 방문하여 인사를 시켰던 총회장 목사님 얘기인즉, 지진이 있었던 그날 이 본부 건물에서 일하던 사람 19명이 건물에 깔려 죽었다고 합니다. (당시 지진으로 희생된 사망자수가 20만을 훨씬 넘으니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진이 오후 5시에 일어났으니 망정이니 그렇지 않았다면 더 많은 희생자들이 생길 수 있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 코스페네 교단의 총회장의 23세난 아들 또한 희생자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그만 양쪽 다리가 건물 잔해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다음날 죽었는데, 아버지인 총회장 목사님은 그날 밤을 세워가며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아들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부활의 몸으로 다시 만나자고 서로 얘기를 나눴다고 말합니다. 다리를 짤라낼수도 없고, 건물 잔해를 드러낼수도 없어 그냥 서로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하는 일 외에 아무런 방법이 없었던 셈입니다. 물론 당시의 현장은 자신의 아들 외에 다른 사람들 또한 같은 처지에 놓여 있었을 것이니, 아들의 손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총회장 부부는 (부인은 그 학교의 책임자로 일하고 있음) 자신의 아들이 죽어간 그 죽음의 현장을 부활의 신앙과 교육을 통해 민중들의 부활의 현장으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의 미래가 곧 자기 아들의 미래임을 알고 기쁨과 희망 속에서 힘차게 일하던 저들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오후에는 우리가 돕고자 하는 고아원을 방문했습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로 대여섯살에서 고등학생에 이르는 아이들 2백명이 있었습니다. 본래 있던 건물이 무너져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현재 이곳은 돈이 있어도 집이나 건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 고아원은 잠자는 시설은 없었습니다. 그럴만한 운영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친척이나 아는 집에서 집안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가사노동자인 아이들입니다. 낮 동안만 이곳에 와서 학교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촐망촐망한 눈을 가진 저들이 멀리서 우리가 왔다고 공연을 한다고 합니다. 공연은 대부분이 춤이었습니다. 아프리카에 뿌리를 둔 아이티 민속춤이었는데, 아주 몸동작이 빠른 춤들이었는데, 제가 그만 기가 발동을 해서 저들과 함께 한 곡을 추었습니다.(하하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더군요.)
저녁에 다시 코스페네 교회 지도자들과 회의를 갖고 후속 모임을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저들은 말합니다. 현재 외국에서 많은 단체들과 국가의 지원이 있지만, 그 지원들은 모두 위에서 사라지고 가난한 자들의 손에는 주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선교사님들의 얘기인즉, 현재 11,000개의 NGO 단체가 일하고 있는데, 기금의 85% 이상은 모두 운영비로 사라지고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티 정부 또한 무질서의 혼란 속에 있어, 컨테이너가 항구에 도착을 해도 이를 빼내는 일이 매우 어렵다고 말합니다. 실제 어떤 한인 목사님은 4개의 컨테이너에 물건을 실고 왔지만, 구비 해오라는 서류가 너무 많고 이를 준비해도 다른 요구 조건이 많아 이를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컨테이너 한개당 하루 항구에 머무는 벌금이 150불입니다.) 정부 관계자들은 대부분 백인에 혼혈인들이라 다수를 차지하는 흑인들의 복지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 셈입니다.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평등한 분배와 교육의 기회를 요구하는 코스페네 교회 지도자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와 요구가 어디에서 오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남미의 교회들은 가보지 못해 잘 알지 못하지만, 6.70년대의 해방신학은 그냥 이론으로 사라진 신학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교회 복음의 현장에서 실천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돗대기 시장같은 무질서 속에서 출국 수속을 마치고 뉴욕에 도착하여 저녁 식사를 위해 한 한인 식당에 갔습니다. 음식물이 넘쳐 남은 물론이요 화장실을 갔는데 소변을 본 아이 하나가 손을 씻고 손을 닦는데 페이퍼 타월 한장이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서너장을 계속 뽑아내 한번 쓰윽 닦고는 버리는 일을 보면서 분노가 일었습니다. 그가 뽑아낸 그 큰 휴지들은 물한방울 묻지 않은 채 그냥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고 있었고, 그 아이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습니다. 아이티에서는 화장실을 찾기도 힘들었지만, 화장실에 가더라도 화장지가 없습니다.(그것도 화장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열악한 시설입니다.) 30여년전 처음 미국에 도착해서 맥도날드 식당을 갔는데, 한 미국 아이가 콜라가 바닥에 엎지러지자(식탁이 아닌 바닥!) 이를 닦기 위해 한뭉큼의 냅프킨을 꺼내더니 이를 닦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만, 비행기로 불과 3시간 차이의 아이티와 미국, 같은 날 아침과 저녁의 사회 상황은 너무나 정반대였습니다. 하나는 세계 최고의 부자 강국, 다른 하나는 여기에 예속되어 있는 세계 최고의 가난한 나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하시는 것일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뜨거운 태양열 아래 허허벌판 광야 같은 곳에 UN이 세워 놓은 2만개의 즐비한 텐트를 바라보면서, 저들은 언제 저 텐트 생활을 벗어나 직업을 갖고 정상 생활을 할 수 있을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80%가 넘는 실직율, 공장이 무너지기 전 하루 3불이라도 벌었지만, 지금은 그것 마저 잃어버린 저 가난의 나라 아이티, 그러나 흑인 노예들이 백인들과 싸워서 세운 세계 유일의 독립국가 아이티. 미국 독립 몇 년후에 독립이 되었으니 미국의 영향을 받아 독립을 한 셈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의 현대판 식민지로 전락하여 미군들이 거주하고 미국의 경제적 노예로 전락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연하게도 오늘은 미국이 독립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백인이 백인들을 대항해서 세운 나라, 자유와 평등을 주창하여 세웠지만, 본래 이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원주민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고, 오히려 자유의 이름으로 세계의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아이티나 푸에토리코와 같은 소수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푸에토리코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이티 교회 지도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남북한의 통일을 기도하겠으니 여러분들은 아이티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저들이 진정 사회 부정의와 경제 불평등을 타파하고 인종 차별을 벗어나 모든 국민이 하나되는 그날이 바로 세계의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곧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는 그날임을 믿고 기도합니다.
2010년 7월 4일 주일 아침 미국 워싱톤에서










아이티 민중의 현실에 마음이 무척 아파오는군요.
그래도 춤추는 목사님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습니다.